[한국교회사연구소 공개대학 - 교회 설립부터 신유박해까지 7]

지난 15일 서울 중구 한국교회사연구소 회의실에서 ‘한국 천주교회사 강의 - 교회 설립부터 신유박해까지’ 9번째 공개대학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방상근 연구실장(한국교회사연구소)은 창설 초기 한국교회의 규모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강의했다.

방상근 연구실장은 “조선에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1789년 말까지는 1,000여명 정도였던 신자수가 1794년 말에는 4,000여명까지 그리고 1795년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1800년대 말에는 1만 여명으로 신자수가 꾸준히 증가했다”고 밝혔다.

신자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 충청, 전라 등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어갔으며, 특히 서울에서는 도성 안에 신자의 68.3%가 거주했다. 서소문과 남대문을 잇는 도성 안은 당시 서울 지역 교회의 1차적인 중심지였다. 도성 밖에서는 칠패(七牌) 시장이 있던 남대문 근처와 당시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던 마포와 가까운 아현 등지에 신자들이 많이 살았다.
 

▲ 지난 15일 서울 중구 한국교회사연구소 공개대학에서 방상근 연구실장이 한국교회 창설 초기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신자들의 입교동기를 살펴보면 양반과 남성 신자들은 학문적 호기심과 종교적인 신념으로 입교했는데, 평민과 여성 신자들은 대체로 내세의 복락(福樂)을 바라거나 비참한 신세 때문에 종교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병을 고친다거나 현세에서 복을 바라는 경우도 많았는데, 방 연구실장에 따르면 “순교자와 관련된 물품은 병을 낳게 하는 기적을 행하는 물건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방 연구실장은 “의원이 더 이상 살 가능성이 없다고 진단했던 사람이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목판을 담갔던 물을 마시고 나았다던가, 거의 죽게 된 사람이 순교자들의 피에 적신 수건을 만지고 나았다는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순교자에 대한 공경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특히 신자들은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윤지충과 권상연의 피로 젖었던 수건을 간직하고, 윤지충이 감옥에서 쓴 공술기인 <죄인지충일기>가 필사되어 읽혀지기도 했다.

한편, 성직자가 주문모 신부 한 명뿐인 상황에서 신자들은 어떻게 교리를 공부했을까? 주문모 신부는 신자들의 교리 교육을 위해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 등 천주교 서적을 한글로 번역해서 보급했다. 방 연구실장은 “신자들이 교리서를 필사해서 서로 빌려보며 부족한 교리 지식을 보충해 갈 수 있었고, 특히 십계명은 전체 신자의 3분의 2가 외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포도청 및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천주교 신자들의 진술 내용과 판결문을 모아 편찬한 <사학징의>를 보면 신유박해 때 압수된 기도서, 신심 묵상서, 성인전, 교리문답, 교리서 등 약 120종의 책과 90여 건의 성물, 성화의 목록이 기록되어있다. 방 연구실장은 “이 목록으로 보아 당시 신자들이 기도와 묵상 생활에 충실했고, 성물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방 연구실장은 “압수된 성물 중에 묵주가 많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신자들이 묵주신공을 많이 바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홍낙민이 일상생활에서 묵주신공을 빠트린 적이 없었고, 김광옥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묵주신공을 그치지 않았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방 연구실장은 “당시에 모든 신자들이 성사의 은혜를 받지는 못했지만, 대부분의 성사가 집전되고 있었다”며 “신유박해 때 압수당한 서적 중에 <고해요리>, <성체문답>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해성사와 성체성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러나 당시 주교가 없었으므로 견진성사가 이루어졌을지는 의문이며 신자 중에 견진성사를 받았다는 기록도 없다”고 설명했다.

다음 강의는 29일에 한국교회사연구소 백병근 선임연구원이 수많은 순교자가 발생한 신유박해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