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지요하]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4월 16일 이후 내게는 세 번의 작은 ‘고비’가 있었다. 큰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는 고비들이었고, ‘천만다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그 일들을 돌아보니 다시금 세월호 생각이 난다. 왜 ‘천만다행’이 세월호를 비켜갔는지 생각할수록 가슴 아프고 눈물이 난다.

서산휴게소 바로 앞에서 펑크 난 버스

4월 20일은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큰 축일인 ‘부활주일’이었다. 우리 고장(충남 태안) 성당에서 오전의 장엄미사에 참례하며 성가대 봉사를 했다. 미사가 끝나자마자 꺼놓았던 스마트폰을 켜보니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경기도 유무상통마을의 방구들장 신부님 메시지였다. 진도를 가려 하는데 함께 갈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함께 갈 수 있으면 오후 2시에 행담휴게소에서 만나자는 말씀도 있었다.

나는 미사 직후 신부님 수녀님들과 함께 하는 봉사자들의 회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곧바로 성당을 떠났다. 잠깐 집에 들러 약 가방을 챙겨 가지고 행담도로 출발했다. 행담휴게소는 서해안고속도로 상행선과 하행선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휴게소다. 태안에서 행담휴게소까지는 50분이면 충분했다.

나는 서해대교를 지나 평택IC로 나갔다가 다시 평택IC를 이용하여 하행선을 타고 내려와 행담휴게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적당한 자리에 내 차를 놓고 잠시 기다렸다가 유무상통마을 ‘성 베드로의 집’ 소관 중형버스에 동승할 수 있었다.

‘미리내실버타운’의 어르신들과 도우미들, 유무상통마을 여러 시설들의 도우미들 합 20여 명과 방구들장 신부님이 타고 있었다. 나는 버스에 편히 앉아 진도를 갈 수 있었다. 태안에서 진도까지 차를 가지고 간다는 건 건강도 좋지 않은 내게 무리가 될 터였다. 내 건강 사정을 잘 아시는 방구들장 신부님이 내게 또 한 번 호의를 베푸신 것이어서 여간 고맙지 않았다.

그런데 버스가 서산휴게소를 지날 때였다. 쾌속으로 잘 달리던 버스 밑바닥 쪽에서 괴상한 진동음과 함께 차체가 흔들렸다. 뒷바퀴 펑크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운전기사가 버스를 길가에다 세웠다. 나도 내려가 보니 왼쪽 뒷바퀴 두 개 중에서 안쪽 바퀴가 심하게 손상되어 철사까지 튀어나와 있었다. 도우미들 두어 명이 멀찍이 가서 손수건을 흔들어 달려오는 차량들에게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운전기사는 휴게소로 가서 근처 타이어 수리업소를 알아본 후 통화를 했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 조심스럽게 조금 후진을 한 다음 휴게소 마당으로 들어가 한쪽에다 차를 놓았다. 잠시 후 수리업소 차량이 와서 타이어 교체 작업을 했다. 한 시간 이상 시간 손실이 생겼지만, 서산휴게소 바로 앞에서 펑크가 난 덕에 휴게소 마당으로 버스를 이동시켜 무난하게 타이어 교체작업을 할 수 있었고, 또 수리업소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좀 더 일찍 달려올 수 있었다.

일행 중 누군가가 휴게소에서 먼 고속도로 한 중간에서 펑크가 났더라면 어쩔 뻔했느냐며 천만다행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이게 다 내 덕분이에요. 행담휴게소에 들러 나를 태우고 온 덕에 서산휴게소 바로 앞에서 펑크가 난 거라구요.”

내 말을 들은 운전기사와 모든 이가 동감을 표시하며 내게 미소를 지어보이기도 했다. 나는 천만다행이라는 말이 새롭게 실감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일순 세월호 쪽으로 생각이 미쳐서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 진도체육관 마당의 ‘광주대교구’ 천막 안에서 수원교구 총대리 이성효 리노 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에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과 함께 참례. ⓒ지요하

우리 일행은 휴게소에서 구입한 김밥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저녁을 먹었고, 저녁 8시 진도체육관 마당의 ‘광주대교구’ 천막 안에서 수원교구 총대리 이성효 리노 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에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과 함께 참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밤길을 달려 다시 서해대교 행담휴게소에 들러 라면으로 야식을 한 다음 나는 일행과 헤어져 내 차에 올랐다. 내가 집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3시였다.

화성휴게소에서 펑크가 난 승용차

4월 26일, 나는 아내와 함께 출타를 했다. 올해 연세 91세이신 모친의 건강상태가 양호해서, 토요일을 맞아 부부 함께 출타를 할 수 있는 것도 천만다행이었다. 우리 부부는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로 갔다. 공세리성당에서 갖는 한국가톨릭문인협회 정기 성지순례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미사참례부터 했다. 그리고 새로 회장을 맡은 소설가 오정희 선생을 비롯한 수십 명 교우 문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교육관 앞 너른 마당의 천막 안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각자 자유 시간을 가진 뒤 오후 1시 30분 일행과 헤어졌다. 서울에서 버스 두 대를 타고 온 교우 문인들은 모두 아산 민속마을로 향했고, 우리 부부는 서울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의 서해안고속도로 상행선은 전혀 막히지 않았다. 하행선은 차량이 많았고, 부분적으로 정체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정체현상을 겪는 반대 차선 차량들을 보면 괜히 미안해지기도 했다. 저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리라는 생각도 하면서 나는 쾌속으로 달렸고, 화성휴게소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휴게소에서 자판기 커피도 빼어 마시며 여유를 즐기고, 마누라에게 아이스크림도 사다 준 다음 나는 다시 차에 올랐다. 그리고 화성휴게소를 빠져나가려는데, 돌연 뒷바퀴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며 차체에서 기분 나쁜 진동이 일어났다.

차를 세우고 나가보니 왼쪽 뒷바퀴가 폭삭 내려앉아 있었다. 타이어 공기가 완전히 빠져버린 상태였다. 나는 차에 올라 조심조심 이동을 하여 마당 가녘 그늘진 곳에 차를 놓았다. 그리고 보험회사로 전화를 걸어 ‘긴급출동’을 불렀다.

10분쯤 후 긴급출동 차량이 왔다. 젊은 직원이 내 차의 타이어를 보더니 “운이 좋으시네요. 천만다행이에요”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펑크 난 타이어를 빼내고 스페어타이어를 끼워주었다. 처음 안 사실인데, 스페어타이어는 폭이 좁았다. 젊은 직원은 내게 시속 80Km 정도를 유지하라는 말을 해주고 금세 돌아갔다.

내 뇌리에 ‘천만다행’이라고 했던 그 직원이 말이 남게 됐다. 정말 그랬다. 타이어 손상이 어느 지점에서 생긴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110Km 정속을 유지하며 화성휴게소까지 잘 달려왔다. 펑크 사실은 전혀 알지를 못했다. 차에 올라 출발을 해서 휴게소 마당을 벗어나려다가 펑크 사실을 알게 됐다.

고속으로 달리던 중 펑크가 난 것도 아니고, 고속도로 한 중간에 차를 세운 것도 아니었다. 휴게소 마당 가녘에다 차를 놓고 긴급출동을 불러 무난히 타이어 교체를 할 수 있었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내게 오래 기억될 일이었다.

심야의 고속도로에서 고라니와 충돌하다

4월 30일에도 나는 서울엘 갔다. 저녁 7시 30분 대한문 앞 광장에서 거행된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의 첫 번째 거리피정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세월호 희생자들과 모든 이웃들을 위한 참회 추모미사’에 참례하며 또 눈물을 흘렸다.

미사 후 신림동에 있는 대학생 아들 녀석의 자취방으로 가서 잠깐 눈을 붙이고 다음 날 새벽 3시에 출발했다. 나는 새벽 운전을 좋아한다. 2011년 가을부터 새벽 운전을 참 많이도 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여의도 거리미사, 대한문미사 등에 적극 참례하면서, 꼭두새벽에 차를 몰고 집에 내려온 일은 자연 부지기수가 되어 버렸다.

꼭두새벽의 운전은 우선 고속도로에 차량이 거의 없어서 좋다. 부분적으로는 내가 고속도로를 전세 낸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조금은 고독하기도 한데, 그 기분도 좋다. 때로는 한숨도 자지 않고 운전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한 손은 핸들을 잡고 한 손은 묵주를 쥐고 있어서, 졸음도 겪지 않는다. 한 순간도 졸아본 적이 없다. 서울 신림동에서 태안군 태안읍의 우리 집까지는 110Km 정속을 유지하면 1시간 40분 정도 걸리고, 묵주기도를 35단 정도 할 수 있다.

5월 1일 새벽에도 나는 한 손에는 묵주를 쥐고 110Km 정속을 유지하며 달렸다. 그런데 화성휴게소를 막 지났을 때였다. 중앙분리대 바로 옆 차로를 타고 달리는데, 갑자기 고라니 한 마리가 정면으로 확 달려들었다. 너무도 순간적이어서 브레이크를 밟을 새도 없었고, 핸들을 꺾을 수도 없었다. 그대로 치고 달렸다.

차량이 뜸한 고속도로로 뛰어든 고라니가 도로를 가로지르려다가 중앙분리대 때문에 앞이 막히는 순간 놀란 나머지 내 차 앞으로 달려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중앙분리대 바로 옆길을 피하고 가운데 차로를 선택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 이후로는 밤 운전을 할 때 중앙분리대 바로 옆길은 타지 않는다.

▲ 팽목항과 실내체육관 앞 천막 성당에는 같은 그림이 있다. 물에 빠진 베드로가 예수님의 손을 굳게 잡고 있는 그림이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실종자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하느님이 저토록 굳게 손잡아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정현진 기자

나는 그냥 논스톱으로 달려 집에 도착했다. 아파트 주차장에 파킹을 하고는 차를 살펴보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올라가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햇살이 퍼졌을 때 나가서 차를 보니 앞 범퍼가 깨어져 버렸는데 고라니 털이 많이 묻어 있었다. 본네트 쪽에도 흔적이 있었다.

나는 보험회사에 연락한 후 차를 정비업체에 맡겼다. 수리비는 65만원인데, 보험회사에서 45만원을 물어주고 나는 20만원을 부담했다. 고라니 때문에 생돈 20만원이 나간 셈이었다. 그런데 보험회사 직원도, 정비업체 직원들도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야간 운전 중 고라니 때문에 차가 중앙분리대나 길가에 처박히기도 하고 사람이 다치기도 하는데,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또다시 천만다행이라는 말이 내 뇌리에 엉겼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갑자기 슬픈 생각이 들었다. 정비업체 여직원에게 카드로 20만원을 결재하면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요즘 내게 천만다행인 일이 자꾸 겹치는데, 왜 세월호에는 천만다행이 비켜가 버렸는지 너무 가슴 아파요. 세월호도 천만다행인 상황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그 말을 하고 보니, 또 한 번 눈물이 났다.


지요하 (막시모)
소설가, 대전교구 태안성당 신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