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열전] 최재선 전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자문위원

세상이 돈으로 미쳐간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어서, 귀찮아서, 두려워서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다 하지 않았을 뿐. 각각의 사람들이 어깨에 둘러매고 있던 욕심과 비겁함, 무기력이 응집된 결과는 부정하고 싶을 만큼 끔찍한 대형사고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돈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온 어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돈보다 귀한 가치가 현실에서도 빛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삶에서 지혜를 배우고 싶었다. 과거와 다른 미래를 살아가려면, 다른 삶을 만나야 했다.

최재선 씨는 수십 년간 제도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에서 33년간 실무자와 자문위원으로 일했고, 2004년 은퇴 후에는 사회교리 강의와 기고 활동을 활발히 해왔다. 현재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을 비롯해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우리신학연구소, 김남호복지재단 이사 등 교회와 관련한 여러 기관에서 직책을 맡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직함은 ‘교회 일꾼’이 아닐까 싶다.

▲ 최재선 씨는 몇 번이나 “내가 큰일을 한 것처럼 기사를 쓰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한수진 기자

외국계 회사 입사 일주일 만에 사표 쓰고 가톨릭 구제회 들어가
데일리 서강대 총장 신부 "그럴 줄 알았다"

그는 이른바 ‘구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할머니의 손을 잡고 성당에 나가던 기억은 지금도 아련하게 마음 한 구석에 새겨져 있다. 유독 그를 예뻐하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중2병을 앓느라” 성당에 나가지 않았던 몇 년을 제외하면, 대체로 착실한 ‘성당 오빠’로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신앙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던 계기는 서강대학교 입학이었다. 원하던 학교에 불합격하는 바람에 선택한 차선책이었지만, 그곳에서 최 씨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신앙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배웠다. 그는 “전공이 역사학이었는데, 부전공인 철학과 신학 수업을 더 열심히 들었다”고 기억했다. 당시 서강대 총장 데일리 신부는 졸업 후 조교로 일하던 그를 잘 나가는 외국계 회사에 취직시켜줬다.

“돈을 벌기에는 적당한 곳이었죠.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이런 일을 해야 하나,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의 인생에는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신학적으로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표현하지요. 나이가 들고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신 거였구나.”

최재선 씨는 입사 일주일 만에 사표를 썼다. 총장 신부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미국 주교회의 산하 가톨릭 구제회 한국지부를 연결해줬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 다량의 구호물자를 지원해온 규모 있는 해외원조기구였다. 최 씨는 1970년부터 4년간 말 그대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가난한 사람들을 만났다. 퇴근도 없이 매일 흙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에 발을 내딛으면서 그는 행복을 느꼈다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게 참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빈민촌에서 드리는 '내 인생 첫번째 미사
쓰레기 산에서 찾은 최고의 값비싼 봉헌물, 빈 양주병  

1974년 가톨릭 구제회가 한국에서 사업을 철수한 뒤에는 지학순 주교를 도와 한국 카리타스(한국어 명칭 ‘인성회’, 현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설립과 실무에 참여했다. 그해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 카리타스 대표자 회의 참석은 그의 삶에 또 한 번의 큰 전환이 됐다. 참석자들은 일주일간 빈민촌에서 가난한 가정의 일원으로 사는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비좁고, 악취가 풍기는 그곳에서 최 씨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계시는 하느님을 목격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집의 가장인 아저씨를 따라 미 해군기지 옆에 있는 쓰레기장으로 갑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난지도 같은 쓰레기 산이었는데, 거기서 쓸 만한 물건을 찾는 것이 마을 주민들의 생계 수단이었어요. 유리병, 칫솔, 속옷, 별의 별 것을 다 주웠죠. 운이 좋은 날엔 내용물이 반 쯤 남은 통조림도 주웠고요.”

쓰레기 산에서 땀에 젖은 등을 굽히고 일용할 양식을 캐내던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그의 눈앞에 선하다. 일주일이 지나고, 빈민촌 공터에서 열린 주일미사에서 아저씨는 빈 양주병을 제대 앞에 봉헌했다. 그가 한 주 동안 쓰레기 산에서 찾은 가장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빈 병을 들고 제대 앞으로 나가는 아저씨를 보면서 눈물이 쏟아졌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배운 거죠. 그들이 미사를 얼마나 기쁜 축제로 삼는지, 그리스도의 몸을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예식으로 남은 미사가 아닌, 살아있는 미사였죠. 제 인생의 첫 번째 미사였어요.”

현장 체험 이후 최 씨는 처음으로 교회의 사회회칙을 접했다. “가난한 라자로도 부자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인간 공동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이다.”(<민족들의 발전> 47항) 가난한 사람이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존재가 아니라, 식탁에 앉아야 할 ‘인간’이라는 혁명적인 가르침은 그의 마음과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는 마닐라에서의 체험이 “내 삶의 큰 뼈대를 만들어 준 사건”이라고 말했다. 만약 이 모두가 하느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뤄진 일이라면 한국 교회에도 큰 사건이 될 일이었다. 인성회 설립 제안문에 한국 교회 역사상 공식 문서로는 처음으로 ‘사회사목’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은 그 분의 뜻이 아니라면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 인성회에서 발간하던 <하나되어>에 자주 실렸던 프리츠 아이젠버스의 "급식대의 그리스도"

사회사목의 위한 '인성회'.. 의식화 교육 지원
교회 안에서 성장한 가난한 이들의 연대는 교회 밖으로도 퍼져나가고..

사회사목적인 관점에서 시작된 인성회는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기구였다. 인성회 설립 당시 한국사회는 급격한 산업발달과 농촌의 쇠퇴, 도시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경험하고 있었다. 농촌에서 산업현장으로 빨려 들어간 사람들은 얼기설기 세워진 도시의 슬레이트 지붕 밑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농민에서 도시 빈민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채웠던 사람들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은 권력을 갖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빈곤하며, 사회 주변으로 밀려나 소외된 이들이었다.

농민, 노동자, 도시 빈민은 산업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가난한 계층’이었다. 인성회는 교회 안의 가난한 계층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고,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을 조직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했다. 각 지역에 흩어진 천주교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분야별로 연대조직을 꾸릴 수 있도록 사무실 공간을 내주거나, 활동가들에게 사회교리 교육과 영성 피정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인성회의 주요 활동 중 하나였다. 교회 안에서 성장한 가난한 이들의 연대는 교회 밖으로도 퍼져나가 한국 사회 운동의 성장에 많은 보탬이 됐다.

최 씨는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교회가 주목해야 할 가난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눈을 더 넓게 떠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사목은 현실인식, 현실분석, 신학적 성찰, 행동이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고 성장해야 해요. 이걸 게을리 하면, 쳇바퀴처럼 제자리만 맴돌게 되죠. 노동사목을 예로 들면, 교회가 이주노동자 문제를 당면 과제로 삼은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한 단계 성장한 거예요. 다만 그와 동시에 여전히 기존 노동자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있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되죠. 사회는 이전보다 다변화되고 있어요. 교회는 현실을 인식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을 계속 따라잡아야 해요.”

그는 지난 삶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일만 했다”면서, “나는 굉장한 이기주의자”라고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관계된 일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자, 보람 있는 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최 씨는 1975년 주교회의가 인성회 설립을 승인한 일, 1976년 사순절 희생에 나눔의 의미를 더한 사순절 운동 시작, 1992년 한국교회의 첫 해외원조 활동 시작, 1995년 북한 식량지원 활동을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꼽았다.

교회와 그리스도인, 다가올 기쁨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하느님의 도구

이런 기쁨들 가운데 그가 얻은 것은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불쏘시개”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모인 공동체이자, 하느님 나라를 희미하게나마 보여주는 표지”인 교회도 마찬가지다. 하느님 나라, 곧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올 의로움과 행복, 기쁨의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안팎에서 빛나는 작은 불씨들은 언젠가 큰 불길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의 완성을 앞당기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인간이 움직이지 않으면 일을 안 하시는 것 같아요. 인간이 움직여야 하느님도 자신의 뜻을 인간을 통해 실행하신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이걸 해주십시오’라고 바라는 것은 하느님을 자신의 하인으로 부리는 거죠. 또한 좋은 일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성취되지 않아요. 나쁜 일은 인간 혼자서도 성취할 수 있는데, 좋은 일은 반드시 하느님이 함께 해주셔야 하더라고요.”

최 씨는 인터뷰를 하면서 몇 번이나 “내가 큰일을 한 것처럼 기사를 쓰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자신은 하느님의 작은 불쏘시개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내가 얼마나 큰일을 했고, 얼마나 자랑스러운 사람이냐는 물음과 유혹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이토록 솔직한 고백에 이르게 된 그의 삶은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그리스도인의 좋은 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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