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탐구생활 - 6]

“호박 다 엥겼어?”
“아직요.”
“깨는 숭궜어?”
“아마 안 심었을 걸요?”
“아따, 싸게싸게 숭구지 뭐하고 있어. 그러다 때 놓치면 우짤 거여.”

요즘처럼 농사일이 바쁜 때에도 틈틈이 우리 집에 들러 농사 훈수를 두느라 더 바쁜 수봉 아주머니. 나와 우리 신랑을 보면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를 하신다. “제발 저희를 가만히 좀 내버려두세요!”하고 소리치고 싶지만, 사실 아주머니가 고마울 때도 많다. 넋 놓고 있다가 타이밍을 놓치기 십상인데 아주머니가 일깨워 주시는 덕분에 그나마 때를 놓치지 전에 그 꼬리라도 잡고 갈 수 있으니까.

아마 농사짓는 흉내라도 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때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건 달력 보고 날짜에 맞춰 일을 계획하고 움직이는 것과는 또 다르다. 감잎이 피어날 때 무얼 하고, 자귀나무에 꽃이 필 때 무얼 하는 식으로 자연을 세심히 관찰하는 가운데 때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농사란 천지만물의 움직임에 눈과 귀를 환히 열고 온 몸으로 기꺼이 함께 춤을 추는 것! 한마디로 자연과의 합주 속에서 리듬을 타고 박자를 맞추어야 된다는 건데, 이게 정말 쉽지가 않다.

그러니 언제나 한 발 먼저 나가 때를 기다리며 농사를 짓는 수봉 아주머니가 내 눈에는 사람으로 안 보일 때가 많다. 어쩌면 그렇게 부지런하실 수 있을까? 저렇게 연약한 몸으로, 어떻게 그 많은 논과 밭을, 알뜰살뜰 돌보고 말끔하게 매만지는 것일까?

아주머니가 농사짓는 땅을 돌아보면 정말이지 놀랍다. 놀리는 땅 하나 없이 논둑에는 호박과 콩을 심고, 기어 올라갈 자리가 있는 곳마다 오이나 수세미, 동부 등을 심는다. 심지어 밭고랑마저도 상추나 열무를 심어 알뜰하게 쓰신다. 이른 봄이면 밭 가장자리 대나무를 베어 돼지감자 심는 자리를 넓히고, 집 뒤꼍이나 구석과 같은 자투리땅에도 어김없이 무언가를 심어 가꾸신다. 몸을 놀리지 않듯이 땅도 결코 놀리지 않는 것이다.

그뿐인가. 후미진 데 있는 산밭은 거의 대부분이 아주머니네 밭이다. 올 때 갈 때 다리 품도 많이 팔아야 하고, 수확물을 집까지 옮기는 것도 예사 일이 아닐 텐데 어떻게 농사를 지으시는지…… 올해는 다울이와 내가 자주 오르는 산 속의 꼭대기 밭에까지 고추를 3000주 가까이 심으셨다.

▲ 수봉 할머니가 모내기에 앞서 논둑을 정비하시는 모습. 드넓은 땅에 한 점이 되어 그대로 한 폭 그림이 된다.ⓒ정청라

지난 봄, 마침 다울이와 산에 오르다가 아주머니가 고추 이랑 만드시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가운데 괭이질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고, 아주머니는 천천히 한 줄씩 고랑을 그려나갔다. 고요히 숨을 내쉬는 것처럼, 한 땀씩 바느질을 하는 것처럼, 너무나 편안하고 가벼운 괭이질에 나는 마음이 숙연해졌다. 다울이도 뭔가 느끼는 게 있는지 연신 수봉 아주머니네 밭을 내려다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할머니 힘들겠다. 그치? 할머니는 어떻게 힘이 생겨?”
“힘은 쓰면 쓸수록 생기는 거야. 힘들다고 안 쓰면 힘이 없어져. 아마 다울이보다 엄마보다 수봉 할머니 힘이 더 셀걸?”

그렇게 얘기를 해놓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나도 정말 궁금해졌다. 수봉 아주머니의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주머니께 직접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젊어서부터 일 무서운 건 몰러. 그러니 동네 할매들이 손이 야무치다고 다 나만 불러다 썼당께. 수봉 양반은 허구헌날 술 먹고 놀음 하고……, 긍께 일은 거진 내가 다 했제. 우리 막둥이를 업고 못자리 하고 보리 베고……. 밤으로는 베 짜서 놀음 빚 갚고……. 워따, 차라리 지금은 편체, 옛날에 고생한 거 생각하믄 말도 못해.”

결국 수봉 할머니의 힘도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에서 나오는 거였나? 지금도 막내아들이 감당하지 못하고 떠맡긴 손주 둘을 키우느라 애 터지게 농사를 짓고 계시지 않나. 고추, 도라지, 콩, 팥, 땅콩, 돼지감자, 토란대 껍질이나 고구마 줄기 말린 것, 닥치는 대로 팔아 돈을 사서 그걸로 손주들 적금 들고, 보험료 내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수봉 아주머니는 농사일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자연의 리듬을 탈 줄 아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매혹적인 춤사위라고나 할까? 아주머니 몸짓에선 그게 나온다. 논둑을 매만지는 손길에서, 옥수수 밭에서 풀을 매는 뒷자락에서, 무언가 남다른 분위기가 드러난다. 농사일을 즐기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율동과 빛깔이 온 몸으로 뿜어져 나온다. 아주머니에게서 나오는 장정보다 굳센 힘은 아마 거기에 뿌리를 박고 있을 것이다.

수봉 아주머니는
오늘도 바구니 옆에 끼고 야구 모자 하나 눌러 쓰고 밭으로 나가는 수봉 아주머니. 나이는 일흔 둘인데, 주름살이 많아서인지 얼굴로만 봐서는 더 늙어 보이신다. 그래도 할아버지(수봉 양반) 돌아가신 뒤로 얼굴이 폈다고 하는 걸 보면, 그 정도로 어르신이 고생을 많이 시키셨던가 보다. 아주머니는 농사뿐 아니라 이것저것 재주가 많다. 음식도 잘 하시고, 춤도 잘 추시고, 짐승도 잘 기르시고, 하여간 못하는 게 없다. 재주가 많은 만큼 욕심도 많고, 그러면서도 인정도 많고…. 특히나 마을 할머니들을 극진히 대접해서 회관에서 밥을 하면 반찬부터 간식거리까지, 이것저것 챙겨 주신다.
 

정청라
귀농 7년차, 결혼 5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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