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지요하]

▲ 지난달 안산 와동일치의모후성당에서 신자들이 세월호 사고 희생자와 실종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한수진 기자

16일이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한 달이 된다. 지난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눈물을 흘리며 살았다. 이런 생활이 언제 끝나게 될지는 정녕 알 수 없다. 나는 어느덧 노인 연령으로 접어든 나이다. 다행히 아직 안경을 쓰지 않고도 활자를 잘 볼 수 있지만, 그래도 노안이라면 노안이다. 그런 내 노안에 여전히 눈물이 하 많아서, 늘 젖은 눈으로 사는 것만 같다.

매일같이 눈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일상 속에서

나는 매일 아침 4시쯤 기상한다. 매일 아침의 고정적인 소소한 집안일들을 하면서 기도를 하고는(움직이면서 기도를 한다) 컴퓨터 앞에 앉는다. 내가 오늘 지어내는 모든 글들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뜻으로 ‘봉헌의 기도’를 바친 다음 우선 인터넷 매체 기사들부터 읽는다. 구독하는 종이신문도 읽지만, 인터넷 매체의 기사가 좀 더 구체적이고 상세한데다가 이미지들이 현장감을 주어서 자연 열독을 하게 된다.

그런데 기사들을 읽는 일은 고통스럽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 관련 기사들을 보지 않을 수가 없고, 보자니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기사들을 읽기만 하면 눈물이 난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서, 내 컴퓨터 책상 위에는 늘 휴지가 놓여 있다. 그러므로 나는 매일같이 눈물로 하루를 시작하는 셈이다.

5시쯤에는 올해 고교 2년생인 조카딸이 온다. 먼 직장으로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빠가 녀석을 큰집에다 데려다놓곤 한다. 녀석은 큰집에서 두어 시간 아침잠을 자고 학교를 가는데 녀석을 학교에 태워다주는 일은 큰 아빠 몫이다. 한번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녀석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녀석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며 의문을 표해서 “너 고등학교 2학년이잖아. 네 또래 아이들이…!” 하며 거실 바닥으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도 했다.

나는 예민하면서도 수량이 풍부한 눈물샘을 지니고 있다. 타고났지 싶다. 중학생 시절에는 단체 영화 관람을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려서 놀림가마리가 되기도 했다. 다른 아이들은 왜 나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지, 이상하고 섭섭한 마음이었다.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는 사실이 괜히 무섭고 신기하기도 했다.

과거에도 거의 매일 눈물을 흘리며 살던 때가 두어 번 있었다. 한 번은 1983년 KBS TV에서 아산가족 찾기 방송을 할 때였다.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가족들이 남한 땅 안에서도 30년 동안 생사를 모르고 살아오다가 TV 방송 덕분에 상봉을 하게 되면서, 온 나라가 연일 눈물바다가 되곤 했다. 나는 이산가족들의 상봉 장면을 지켜보면서 어지간히도 눈물을 흘리곤 했다.

또 한 번은 2000년 6월 남북 정상이 처음 만났을 때와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을 때였다. 그리고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50년 만에 만나는 장면을 보면서 또 한 번 줄줄 눈물을 흘렸다. 하도 눈물을 많이 흘리다 보니 내 온몸이 정화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눈물 때문에 선친께 책망을 들은 적도 있다. 1986년 1월 29일 미국 우주선 챌린저호가 발사 직후 공중에서 폭발했을 때였다. 우주선 옆구리에서 불꽃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서 사라져 버리는 장면을 TV 생중계로 볼 수 있었다. 승무원 7명이 기체와 함께 사라져버린 순간 나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런 나를 보며 아버지가 혀를 찼다. 아버지의 그런 태도가 나를 더욱 눈물 나게 했다. 시도 짓고 동화도 지으시는 아버지의 그런 태도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 길환영 KBS 사장이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자 가족들을 방문해 사과를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이희훈

눈물 없는 사람들

나는 유난히 눈물 많은 나를 떳떳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눈물의 가치를 믿는다. 눈물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이 세상을 좀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고, 사회 공동선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여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정의감이 강한 사람, 의분을 품을 줄 아는 사람들이 눈물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또 역지사지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눈물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역지사지는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규범이며 미덕이다.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는 것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남의 슬픈 일을 보면서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나 또한 얼마나 괴롭고 기가 막힌 심정일까!’ 생각하면서 함께 슬퍼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인지상정이다. 그 인지상정은 인간이 저버릴 수 없는 고귀한 마음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보편적인 인지상정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세월호 참사 이후 거의 매일 눈물 젖은 눈으로 살아가면서 별난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눈물도 없고, 역지사지할 줄도 모르고, 인지상정도 지니지 못한 부류들을 보면서, 그 때문에 더욱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호 참사로 말미암아 큰 충격을 받고 온 국민이 슬픔 속에서 정부의 태만과 무능에 대해 분노를 표시할 때, 그 판국에서도 ‘종북 타령’을 읊어대는 사람이 있었다. 한기호 새누리당 의원의 ‘좌파 색출’ 발언은 그야말로 어떤 상황에서도 정부를 비판하기만 하면 좌파요 종북이라는 식의 강변이었다. 그 고질병의 노출을 보면서 저 사람에게도 눈물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권은희 새누리당 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지운 ‘실종자 가족 선동꾼’ 운운의 글도 인면수심의 일단이 엿보이는 내용이었다. 더욱이 그가 여성인지라, 저 사람에게도 과연 눈물이 있을까라는 생각 외로 저 사람도 자식을 낳고 기른 엄마일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생각은 세월호 추모 청소년들이 6만원의 일당을 받았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정의실현국민연대’ 정미홍 대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결국 그 터무니없는 글을 지우고 사과를 했지만, 확인되지도 않은 그런 내용의 글을 왜 세상에 공표했는지, 그 경솔함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도 자식들이 있을 텐데, 자식들에게 미안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나와 같은 성씨인 지만원의 ‘시체 장사’ 운운의 글은 한마디로 야만적인 폭언이었다. 문중 행사에서 본 적도 있는 그를 떠올리면서 그에게도 눈물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자니 괜히 창피스럽기도 했다.

홍익대 겸임교수 김호월의 패륜적인 막말은 한국 지식인 사회, 교수 집단의 일각에 드리워진 지성의 허약성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만 같아 안타깝고 측은하기 짝이 없었다. 계속적으로 연민이 끓어오르는데, 내 연민도 그에게는 과분할 것만 같았다.

새누리당 이완구 의원이 원내 사령탑에 앉자마자 미국 여성 교민들이 성금을 모아 <뉴욕타임스>에 한국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비판하는 전면 광고를 올린 것에 대해 ‘정치적 선동’이라고 말한 것은 너무 정치적이고 치졸했다. 그 역시 눈물이 없는 사람일 것만 같다.

세월호, 대한민국의 축소판

세월호 참사는 우리나라의 갖가지 참혹한 현상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보여 주었다. 그중의 하나가 직업정신의 소멸이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의 비겁함과 무능함과 무책임함은 우리나라 공직사회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선사뿐만 아니라, 관료들도 해경도 언론인들도 고유의 직업정신이 아예 존재치 않거나 매우 허약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중에서도 방송매체 언론인들의 직업정신 소멸은 큰 우려를 자아낸다. 권력을 감시하면서 국민들에게 진실과 실상을 제대로 전달해야 할 사명을 그들은 철저히 방기해 버렸다. 권력의 충견 노릇 쪽으로만 모든 의지와 노력을 경주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언론인답지 않은, 또 지성이 결여된 그들의 지리멸렬한 사고 체계로부터 연유한다.

방송 카메라 앞에 서서 유가족을 폄훼하는 발언을 의기양양하게 쏟아낸 MBC 박상후 전국부장, 일선 기자들의 눈물어린 반성문을 ‘선동’으로 몰아붙인 KBS의 성창경 디지털뉴스국장, 본인은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부인했지만 유가족들에 대해 ‘깡패’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MBC 김장겸 보도국장, 방송국에서는 유가족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다가 청와대 호출을 받고 청와대로 달려가 유가족 앞에 얼굴을 내민 KBS 길환영 사장 등은 방송언론을 권력의 충견으로 만들기 위해 안달이 난 위인들이다.

나는 그들에게도 과연 눈물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눈물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혹 눈물을 경멸하는 부류들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눈물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들은 그만큼 역지사지의 눈도, 공감 능력도, 인지상정의 심성도 박약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들에게 우선 눈물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싶다. 눈물이 없거나 부족하더라도 눈물의 가치를 헤아릴 수는 있을 것 같다. 눈물은 약한 것 같지만 강한 것이다. 눈물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따뜻하게도 하고, 유머 감각과 정의감, 의분도 지닐 수 있는 법이다.

눈물은 역지사지의 눈과 공감 능력과 인지상정을 고루 지니게 함으로써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일에 기여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저 눈물 없는 몰인정한 사람들이 잘 명심했으면 한다.
 

지요하 (막시모)
소설가, 대전교구 태안성당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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