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 가난의 길 - 4]

▲ 다미아노 십자가 ⓒ김선명
아시시 시내의 동남쪽 끝에 있는 문 ‘포르타 누오바’(Porta nuova)를 지나 산 다미아노(San Damiano)를 찾아간다. 오래된 올리브 나무들이 햇살 아래 서있는 곳. 그 정경이 “이제부터 평화의 사도에게 당신을 안내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듯하다.

창세기에는 홍수로 하느님이 사람들을 벌하셨던 때 세상이 온통 물속에 잠겨 생명의 기미가 없던 시간, 노아가 날려 보낸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화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었으나 그때 하느님은 무지개로 당신과 인간들 사이의 평화를 보증해 주셨다.

산 다미아노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세 동료의 전기’는 그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산 다미아노 성당을 지날 때 그곳에 들어가라는 소리가 마음속에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가 십자고상 앞에서 열렬히 기도할 때 십자고상이 그에게 말했다. “프란치스코야, 보아라. 내 집이 허물어져 가고 있지 않으냐? 가서 나의 집을 재건하여라.” 그는 몹시 놀라 벌벌 떨며 말했다. “기꺼이 하겠습니다, 주님.” 그러나 그는 잘못 알아들었다. 오래되어 곧 허물어질 것 같은 그 성당을 보수하라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그는 기쁨에 넘쳤다.

1205년 여름의 일이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회심에는 두 가지 만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첫째는 나환자와의 만남이고 둘째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만난 일이다. 고통 받는 인간이 프란치스코를 불렀고 고통 받는 하느님이 프란치스코를 불렀던 것이다.

모두가 세상의 집을 높이 세우려 몰려갈 때 하느님의 집은 무너지고 그 집에 깃들어 사는 인간은 고통 받는다. 창세기에는 바벨탑을 세우려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지만 그 바벨탑이 단지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리라. 인간의 역사에서 우리가 보는 구조물들, 가령 피라미드라든가 만리장성이라든가 맨해튼의 스카이라인 같은 것들이 사실 다 그런 바벨탑이 아니겠는가. 백 년, 이백 년이 지난 뒤 서울 강남의 저 높은 빌딩들은 다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본다.

▲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수도원 정원 ⓒ김선명
다미아노 성당에서 소명을 받은 이후 성인은 하느님의 집을 재건하는 데 헌신한다. 처음에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는 데 착수한다. 먼저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 돈을 마련하여 성당의 사제에게 주었으나 사제가 거부하자 그 돈을 성당의 창턱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때 성인이 돈을 버린 창턱을 지금도 다미아노 성당에서 볼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을 비롯하여 여러 성당을 보수하지만, 사실 그는 자신의 삶으로 쓰러져 가던 교회를 일으켜 세우게 된다. 프란치스코가 수도규칙을 인준받기 위해 로마에 왔을 때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꾼 꿈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라테라노 성당이 무너져갈 때 볼품없는 사람 하나가 나타나 성당을 떠받치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가 재건한 하느님의 집은 무엇이었을까?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의 집은 가난이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나는 기꺼이 나의 약점들을 자랑하렵니다. …… 나는 약할 때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9.10)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하느님은 나의 약함, 가난을 당신 집으로 삼으신다. 우리가 힘과 재물, 명예를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벨탑을 쌓아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일전에 존경하던 신부님을 찾아뵈었다. 교회가 왠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가는 느낌을 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여쭈었더니 “건물이 너무 커져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럴지도 모른다. 집이 커지면 집을 관리해야 한다. 사람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다. 세속 권력의 도움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정작 그 집에 사시는 분은 잊어버린다. 급기야는 잃어버린다. 13세기, 온 세상이 이렇게 하느님을 잃어버렸을 때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살며 하느님이 머무시는 집을 재건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 사명은 라 베르나 산에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몸에 받음으로써 완성된다. 그의 육신 또한 예수께서 머무시는 집이 되었던 것이다.

다미아노 성당 앞쪽에는 현대 조각가 파비아노 바치(Fabiano Bacci)가 조각한 프란치스코의 청동상이 놓여 있다.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들은 성인이 그분의 집을 다시 세워야 할 세상을 내려다보는 모습.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청하시는가? 내가 재건해야 할 하느님의 집은 어디 있는가? 프란치스코의 시선을 따라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에게 물어본다.

▲ 아시시 평원을 내려다보는 프란치스코 ⓒ김선명

저녁 여섯 시, 다미아노 성당의 광장 한 켠에 앉아 나무 수사와 성무일도서를 펴든다. 이국 땅에서 바치는 찬미가 곡조가 따뜻하다.

눈부신 광명으로 낮을 만드사
만물을 비추시는 하느님이여
이제는 하루해가 저물었으니
주님의 영광 앞에 비옵나이다.
……
아득히 높으옵신 우리 하느님
애절한 우리 기도 들어주시고
진종일 노동으로 시달린 우리
어둠에 짓눌리지 말게 하소서.
(‘제2주간 목요일 저녁기도 찬미가’ 중에서)

산 다미아노 성당 아래쪽으로 양떼가 지나간다. 목자 뒤를 따르는 양들 목의 방울 소리가 땡그렁 땡그렁 들려온다.
 

 
 

황인수 신부 (이냐시오)
성바오로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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