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42] 요한 10,1-10
물론 유대인에게는 종교적 배경을 갖는 ‘주님’과 ‘메시아(그리스도)’가 따로 있었겠지만, 현실의 ‘로마권력’(그것이 정치권력이든 경제 권력이든)에 압도당하던 시절, 섣불리 아무한테나 ‘주님’과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붙여 입에 올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다가는 엄청난 참화를 불러올 것이라 그들도 두려워했나봅니다. “카야파는 백성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유다인들에게 충고한 자다.”(요한18,14) 그리고 수석 사제들은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하고 공개적으로 빌라도에게 고백합니다.(요한19,16 참조)
로마제국이 세상을 압도하던 그 시절, 감히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그리고 그토록 고대했던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목숨을 건 증언과 고백과 선포(케리그마)를 오늘까지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그 정체성과 삶의 길잡이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면 로마제국은 끝났을까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백성을 위해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충고했던’ 카야파 같은 사람들과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라며 예수님을 고발한 수석 사제들 같은 사람들은 없는 것일까요?
교회는 전례력으로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부활 제4주일에 전체 하느님 백성이 듣는 주님의 말씀은 ‘도둑과 강도’와 ‘양들의 목자’ 사이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도둑과 강도’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이며, 양들은 그 ‘도둑과 강도’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나며” 그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지만 ‘양들의 목자’는 “문지기가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양들의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또 목자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오늘 말씀만 들으면, 금세 예수님께서 ‘양들의 목자’로서, 또 ‘문’으로서 “당신을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우리 교회와 신앙인에게 ‘기쁨’의 소식, 곧 ‘복음’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요한 9,40)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결코 ‘복음’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인자하신 분의 입에서는 나올 법하지 않은 ‘도둑과 강도’에 대한 ‘고발’이라는 ‘거친 말씀’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다시 이르신 말씀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들”이 누구며, 예수님께서 마음에 두신 ‘도둑과 강도가 누굴까?’ 궁금해 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게 유다인들 사이에 논란을 일으켰습니다.(요한 10,19 이하 참조)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논란거리’에 불과했습니다. 적어도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다른 장면을 보면,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결코 기쁜 소식 곧 복음이 아니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에 심기가 몹시 불편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성경은 곳곳에서 생생하게 전합니다. 한 예만 들어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챕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마르 12,1-12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참조)
이렇게 복음이 전하는 내용을 따라가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누군가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듣기에 ‘불편한 소리’, ‘고발’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묻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 곧 복음인가요? 아니면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소리’인가요?
만일 오늘날 비록 그 때와는 모습을 달리하겠지만 새로운 형태의 ‘로마제국’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위세 앞에 교회 안팎에서 ‘백성의 번영을 위하여 몇 사람쯤 희생되어도 좋다’고 충고하는 이들이나, ‘새로운 로마제국의 지도자만 섬겨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불편한 고발’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복음’이라고, 주님이며 그리스도시라고 믿고 고백하는 예수님(마르 1,1 참조)께서는 오늘의 우리 신앙인에게 ‘도전’하십니다. 당신을 ‘복음’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불편한 고발의 소리’로 들을 것인지 말입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