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41] 요한 20,19-31

우리 교회는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지냈습니다. 그렇지만 슬픈 부활입니다. 그냥 슬픈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아픈 부활입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모를 잃은 사람을 ‘고아’라고 하고, 배우자를 잃은 사람을 ‘과부’ 혹은 ‘홀아비’라고 합니다. 이렇게 가까운 사람을 잃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 있지만, 자식을 잃은 사람을 일컫는 말은 동서양 어디에도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아프고, 슬프다는 뜻일 것입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자신을 그저 ‘죄인’이라고 합니다. 어쩌다 우리는 그런 슬픔과 아픔을 두 눈 뜨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흘이 넘도록 바라보고 있게 된 것입니까?

“평화가 너희와 함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건네십니다. 그것도 세 번 씩이나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평화를 입에 올릴 수조차 없을 만큼 부끄럽습니다.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건네며 하신 일은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몸에는 못 박힌 상처, 창에 찔린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평화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상처, 누군가의 고통, 누군가의 십자가 죽음이 있어야 함을 가르치는 듯합니다. 교회는 평화가 정의의 열매라고 가르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494항) 그런데 우리에게는 정의가 낯설고, 오히려 불의가 익숙합니다.

또 그분께서는 당신의 평화를 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 성령은 죄의 용서를 가능하게 하십니다. 자기 목숨까지 내어 놓을 만큼의 사랑이 없으면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평화가 사랑의 결실이라고 가르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494항)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타적 사랑과 형제적 사랑이 낯설고, 오히려 이기심과 탐욕의 자기애가 익숙합니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2,44-45) 이 말씀이 당대의 그리스도 공동체의 실상을 반영했다기보다는 이상 사회를 그린 것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만, 사람이 사는 공동체 안에, 사회 안에, 사랑과 정의가 없으면 그 같은 공동체 생활이 가능하지 않다는 성찰을 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저마다 필요한 것을 갖기 위해 저마다의 재산과 재물을 내어 놓을 수 있으려면,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고 대신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하겠고, 모든 이웃을 ‘또 다른 나’로 여기려면 불의를 버리고 대신 정의를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을 생각하고 이웃의 필요를 돌보는 대신 내 것을 챙겨야 한다고 다그쳤고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게다가 불의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내 몫을 불려 많은 것을 소유하면 성공이라고 여겼고,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할 것이라고 유혹했으며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우리 가운데 평화가 그리고 정의와 사랑이 실종된 배경입니다.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마음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차가운 이성이 필요한 것은 정의 때문이며, 그동안 우리가 겪은 과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끔찍한 사고들을, 그것도 하나같이 ‘인재(人災)’라는 것들을 겪었습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럴 때마다 함께 고통을 겪었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으며 성금을 모았습니다. 또 그럴 때마다 정부는 사고원인을 파헤쳤고 철저한 대책을 마련했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신문과 텔레비전에 열심히 홍보했습니다. 그렇지만 참사는 마치 연례행사처럼 일어났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사는 사회라면 이래서는 안 됩니다.

따뜻한 마음이 필요한 것은 사랑 때문이며, 그동안 우리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참사의 원인을 파헤치면서, 결국 돈에 대한 탐욕과 그 탐욕이 가져온 정치·경제·사회의 부패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존재) 대신에 돈을 벌기 위해, 사람 대신에 돈을 아끼기 위해서(소유)라고 했습니다. 이런 참사를 자주 겪었는데도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은 이유는 바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대신 악착같이 돈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사는 사회라면 이래서는 안 됩니다.

사랑과 정의의 결실인 평화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열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평화야말로, 베드로 사도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재산”(베드로1서 1,4)이라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두 갈래 길 곧 죽음의 길과 생명의 길이 놓여있습니다. 죽음의 길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넓은 평탄한 길로 보이지만, 생명의 길은 겉으로는 초라하고 가시밭길처럼 좁고 험난해 보입니다.

나 좋으라고, 나 편하라고, 나 즐거우라고, 내 몫을 챙기라고 유혹하는 탄탄대로의 길을 걷는다면 나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웃 그리고 공동체와 사회를 썩게 하고 더럽게 하고 그리고 마침내 시들어 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 조금 불편하고, 나 조금 힘들고, 내 몫을 덜어놓고, 정의와 사랑으로 살며 불편한 길을 걷는다면 나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웃 그리고 공동체와 사회를 생생하고 깨끗하게 하며 마침내 살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어리석은 ‘비움’과 ‘버림’, 고통스러운 수난과 죽음이 맺은 열매는 ‘생명’과 ‘부활’과 ‘평화’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정의로 평화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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