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봉훈 주교 생명 주일 담화 “안락사 허용하는 법으로 변질될 가능성 있어”

 
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장봉훈 주교가 5월 4일 제4회 생명 주일을 맞아 발표한 담화문에서 ‘연명의료에 관한 자기 결정법(안)’을 제정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연명의료에 관한 자기결정법(안)’의 골자는 임종기에 접어든 환자들의 생명 연장에는 별로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의료비용만 소모하는 치료를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결정을 환자 본인이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담화문에서 장봉훈 주교는 “이 법안이 시행되고 그 대상이 확대되어 나갈 때 법이 자칫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으로 쉽게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며, 의료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생명에 대한 책임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밝혔다. 덧붙여 안락사는 살인 행위이며 정부가 나서서 시행을 이끌거나 도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장 주교는 호스피스가 임종 환자의 남은 삶이 편안하도록 돌볼 뿐만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죽음 이후에 하느님 나라에서 맞이할 새로운 삶을 준비하도록 돕는 일이라며 “환자가 연명의료 대신 호스피스­완화의료를 선택할 수 있도록 정부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제도를 마련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장 주교는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선물인 생명을 마지막까지 잘 보존하기 위해 고통 속에서 임종하는 환자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죽음이 괴로움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건너가는 기쁨과 설렘이 시작되는 순간임을 알게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지난 3월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은 말기환자, 연명의료 등 관련 용어에 대해 정의하고, 환자가 연명의료 등을 스스로 선택 또는 거부하는데 필요한 사항을 명시한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권리에 관한 법안’을 대표 발의한 상태이다. 한편, 서울대교구 가톨릭생명윤리자문단(단장 구인회)은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위원장에게 “호스피스-완화치료에 대한 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을 제정한다면 임종 과정의 환자가 의료 사각지대에 내버려질 우려가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권고안 추진경과에 대한 질의서’를 보낸 바 있다.

2014년 제4회 생명 주일 담화문 (전문)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1. 오늘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제정한 제4회 ‘생명 주일’입니다. 생명 주일은 한국 천주교회가 인간생명을 임신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존중하고 보호한다는 의지와 실천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제4회 생명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는 최근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소위 ‘연명의료에 관한 자기 결정법(안)’의 성급한 제정 움직임 대해 우려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을 위한 우리의 관심을 확인하고, 나아가 이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활동에 관한 교회의 오랜 전통적 노력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자 합니다.

2. 최근 정부에서는 가칭 ‘연명의료에 관한 자기결정법(안)’이라는 법률 제정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이 법률(안)의 골자는 임종기에 접어든 환자들에게 생명연장에는 별로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의료비용만 소모하는 치료를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결정을 환자본인이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연명의료와 관련한 환자의 이러한 자기결정권이란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치료를 환자가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용어를 잘못 해석하거나 행사하는 경우,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 환자가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처럼 인식되어, 자신의 생명을 위해(危害)하는 행위까지도 환자 스스로 결정하면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매우 중요하며 존중되어야 하지만, 의료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생명에 대한 책임보다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고 그 대상이 확대되어 나갈 때 이 법이 자칫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으로 쉽게 변질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락사는 살인행위이며 (「의료인헌장」 137항) 어떠한 경우에라도 정부가 나서서 시행을 이끌거나 도와서는 안 됩니다.

3. 임종을 앞둔 환자들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최대한 존중받고, 그 시기에 겪는 고통들에 대해 주위에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장치가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을 치료할 수 없다고 여겨, 이 처지를 전적으로 환자 자신과 가족에게만 맡겨서는 안 되고, 의사와 간호사, 나아가 원목자와 사회사업가, 가족, 친지들이 함께 도움을 줄 때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견디고 받아들이게 할 수 있습니다. (「의료인헌장」 117항) 이를 위해 교회는 물론 정부도 앞장서서 국민들 사이에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가 성숙해지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부는 국가생명윤리위원회가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입법을 권고하면서 명시적으로 주문한 “환자가 연명의료 대신 호스피스-완화의료를 선택할 수도 있도록 정부와 사회는 적극적으로 제도를 마련하고 지원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호스피스는 단지 죽음의 과정을 돌보는 일이 아니라 임종 환자의 남아있는 삶이 편안하도록 돌보는 일이며, 기쁜 마음으로 죽음 이후에 맞이할 하느님 나라에서의 새로운 삶을 준비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호스피스는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와 그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행위로서, 말기환자가 남은 삶의 기간 동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며 살다가 평안한 임종을 맞이하도록 신체적, 영적, 정서적, 사회적으로 돕고 아울러 남아있는 가족과 사별의 슬픔까지도 돕습니다.

4. 말기환자는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죽음의 과정에서 따라오는 고독감, 두려움, 상실감 등의 정신적 고통, 나아가 영적 번뇌를 겪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말기환자는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동반을 필요로 하며 이때가 의료인은 물론 원목자, 사회사업가, 가족, 친지들의 전문적이고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가톨릭교회가 “죽음이 가까울 때 그리고 죽는 그 순간이 가장 축복을 받고 찬양을 받을 때이다. 자연적인 죽음을 맞는 이들에게 조차 이 순간은 충분히 존중하고 보호하며 도움을 주어야 한다.”(「의료인헌장」 115항)고 가르치고 또 실천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임종자들은 이러한 동반의 과정에서 비록 죽어가지만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5. 생명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고귀한 선물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잘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 속에서 임종하는 환자들을 사랑으로 돌보아 이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야 하고, 그 가운데에서 죽음이 괴로움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건너가는 기쁨과 설렘이 시작되는 순간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죽음의 문화가 팽배해 있는 어려운 사회 환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선물인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위해 헌신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풍성하게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2014년 5월 4일, 제4회 생명 주일에
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장봉훈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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