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황 요한 23세(왼쪽)와 요한 바오로 2세 (사진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보도자료)

교황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가 27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시성식에서 동시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시성(諡聖)은 순교자 또는 성덕이 높은 죽은 이를 성인의 품위에 올려, 전세계 교회가 공경하도록 교황이 공식 선포하는 행위를 뜻한다.

성인이 되면, 미사 경본과 성무일도 기도문에 이름이 삽입되고, 동방과 서방 교회 모두의 전례력에 축일이 제정된다. 성체행렬에서 그의 유해를 공경하고, 성화를 그릴 때 천국의 영광스런 빛을 가진 인물로 묘사할 수 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의 축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일인 10월 11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축일은 그의 교황 즉위일인 10월 22일이다.

‘좋은 교황’으로 사랑받은 성 요한 23세 교황

요한 23세는 1881년 이탈리아 북부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1958년부터 5년간 교황직을 수행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좋은 교황’(papa buono)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신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 소박하고 유쾌한 성품을 가졌던 그는 교황직 중심의 경직된 교계제도의 완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요한 23세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중재하는 등 세계 평화 문제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63년에 발표한 회칙 <지상의 평화>에는 평화에 대한 그의 신념이 드러나 있다. <지상의 평화>는 가톨릭 성직자와 신자들을 수신자로 지정했던 이전의 회칙들과는 달리 ‘선의의 모든 사람들’까지 대상으로 삼은 첫 회칙이었다.

이른바 ‘교회의 인권 헌장’이라 불리는 이 회칙은 세계 평화의 기초인 인간의 권리와 의무, 정치와 국제 공동체 안에서 인간과 공권력의 관계, 무기 생산 중단과 완전한 무장 해제 등 세계 평화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평화주의자들의 필독서로 사랑받고 있다.

▲ 교황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해 가톨릭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며 발맞추는 교회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사진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보도자료)

무엇보다 요한 23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해 가톨릭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며 발맞추는 교회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5년도 채 안된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그는 가톨릭교회가 인류를 향해 열려 있는 공동체가 되도록 이끄는 커다란 공을 세웠다.

요한 23세 교황은 후임 교황이었던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시복이 추진됐다. 2000년 9월 3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의 시복식을 거행했다.

세상과 교회의 화해 이끈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1978년 교황에 즉위한 요한 바오로 2세는 456년 만의 비이탈리아인 교황이자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이었다. 2011년 5월 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순례하는 회칙’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그는 교황직에 있던 26년 5개월 동안 104회 해외 방문을 통해 129개국을 방문했다.

유고슬라비아와 르완다, 이라크 등 전쟁이 발발한 지역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수많은 호소와 강론을 통해 세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 여러 전쟁을 실제로 막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기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 존엄성을 중시하고, 폭력의 사용에 단호한 입장을 가졌다. 그의 세계관은 사회와 경제 구조의 재조정을 요청한 그의 첫 번째 회칙 <인간의 구원자>(1979), <자비로우신 하느님>(1980), <노동하는 인간>(1981), <사회적 관심>(1987)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1984년 광주를 방문했을 당시, 공식 행사장인 무등경기장으로 향하기에 앞서 금남로와 전남도청을 먼저 방문해 5.18 영혼들의 넋을 위로한 것은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으로 재임한 26년 5개월 동안 104회 해외 방문을 통해 129개국을 방문해 ‘순례하는 회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진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보도자료)

한편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에 대한 중세 교회재판의 오류를 인정하는 등 과거 교회의 잘못을 공식 인정하며 세상과 화해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2000년 대희년에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가톨릭교회의 지난 과오에 대해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기도 했다.

반면 신앙과 윤리 문제에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확실성의 교황’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교의적 측면에서 양보 없고 의심 없는 태도를 견지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재임 당시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1979년 한스 큉을 시작으로 에드워드 스킬레벡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레오나르도 보프 등 다수의 신학자들을 견책했다.

또한 1992년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공표하는 등 신자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교의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교서를 발표했다. 1994년 발표한 <남성에게만 유보된 사제 서품에 관하여>는 여성 사제직의 불가성을 재천명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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