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40] 사도 3,11-26

슬픈 부활!

우리는 슬픈 부활을 지내고 있습니다. 기쁨의 축제를 지내야 할 이 시기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부모, 형제, 자식을 잃은 가족들, 아직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가족들, 악조건에서도 심혈을 기울여 바다 속을 오가며 ‘생명’을 찾으려는 그 많은 사람들, 이들의 아픔과 고통에 기꺼이 동행하는 많은 봉사자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소식을 속절없이 지켜봐야만 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슬픔과 안타까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와 절망도 있습니다. 어떤 전문가는 이를 두고 ‘시민이 패닉(공황) 상태에 빠졌고’,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입었다’고도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생명이 실종되고 스러질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단순한 궁금함과 호기심이 아닙니다. 배가 기울어지고, 그리고 잠기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그냥 텔레비전의 화면이 아니었습니다. 저 안에서 무수한 ‘생명’이 스러져가고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중매체는 매일 기술적인 결함, 회사의 비리와 승무원의 무책임과 관행, 공공기관의 무책임과 무능, 사회제도와 구조와 예산의 부족함, 관련 기관 공무원의 부적절한 언행과 처신, 거기에 대중매체의 보도 태도 등 수많은 내용을 쏟아냅니다. 이를 아예 ‘총체적 부실’이 낳은 참사라고 정리하는 매체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습니다. 기울어져 서서히 가라앉는 그 시간, 그 배 안에서 그 귀한 ‘생명’이 또렷한 의식으로 겪어야 했을 ‘그 무엇’ 때문입니다.

이 원고를 쓰는 시각에 텔레비전에서는 “지금 5초마다 한 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라며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은 한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라고 도움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에 소홀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구하는 일에 소홀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을 구하는 일보다 더 귀한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랬는지 모릅니다.

▲ 23일 오후 안산 와동일치의모후성당에서 신자들이 세월호 사고 희생자와 실종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한수진 기자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초등(국민)학생 때 옆 산동네에 비행기가 추락했습니다. (진짜 산에 있는 작은 동네가 아니라, 산에 나무 대신에 수많은 집이 들어섰기에 ‘산동네’라 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 방에서 들은 그 엄청난 폭발음의 기억은 또렷합니다. 지금처럼 텔레비전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보던 신문에서 자주 보던 내용도 있었습니다. 몇 차례는 될 것입니다. 탄광에서 갱도가 무너져 많은 광부가 죽었다는 소식입니다. 호텔에서 불이 났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기차역에서 엄청난 폭발사고가 났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물난리가 나서 동네가 침수되어 실종된 사람이 많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이번처럼 바다에서 배가 침몰해서 수백 명이 죽었다는 소식도 기억합니다. 등굣길에 다리 상판이 통째로 강에 떨어져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도, 화려한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소식도, 화재로 어린 아이들이 죽었던 소식도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지붕이 내려앉아 많은 대학생이 죽었다는 소식도 기억합니다. 제 나이 50대 중반인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연도별로 하나하나 찾아보고 싶은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면서도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생성 시초부터 하느님의 창조 해위에 연결되며 또한 모든 생명의 목적이기도 한 창조주와 영원히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는 <가톨릭교회 교리서>(2258항)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생명’의 귀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귀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혹시 우리는 “권력, 쾌락, 인종, 국가, 재물”(가톨릭교회 교리서 2113항)을 하느님보다, 사람의 생명보다 더, 어쩌면 훨씬 더 귀한 것이라고 섬기며 산 것은 아닐까요? 그런 것들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생명쯤이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많은 사고를 겪으면서, 그렇게 무고한 사람의 생명이 속절없이 스러져갔는데도, 여전히 그 같은 일이 반복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연한 사고라면, 불가항력의 사고라면 몰라도, 대부분의 경우 흔히 ‘총체적 부실’, ‘인재(人災)’라고 하니, 불운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철저하게’ 사고의 ‘원인’을 밝히고 재발을 방지하는 ‘대책’이 나올 것이며,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고 ‘약속’하며,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으며 마무리할지도 모릅니다.

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미사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스라엘인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라면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그들이 거룩함과 의로움을 배척하고, 생명의 영도자를 죽이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베드로는 의로움과 거룩함을 배척한 것을 뉘우치고 바로잡으라고 호소합니다. ‘생명’의 영도자를 죽인 것을 뉘우치고 바로잡으라고 호소합니다.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버리고, ‘거룩함과 의로움’과 ‘생명’으로 돌아오라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권력, 쾌락, 인종, 국가, 재물”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리 귀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거룩함과 의로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구하며 살리는 한에서 ‘귀한 것’입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