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번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마감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러자니 좀 아쉽고 서운한 감이 없지 않다. 호치민에서 떠나올 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아마도 조금 더 여유롭게 계획을 세워서, 호치민말고도 다른 지역에도 가보고, 좀 더 다양한 경험도 하여 무언가는 손에 쥐고 간다는 ‘자족감’ 같은 것이 들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짧은 일정에 비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눈 일은 앞으로 베트남 교회일꾼들과 연대하는 데 있어 기반을 다졌다고 생각된다. 신학자와 성직자 뿐만 아니라 평신도 활동가를 만나 베트남 상황과 이들의 활동을 간접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30년이 넘게 가톨릭학생회(YCS)를 위해 일해 온 둥(Nguye Tri Dung) 간사와 주간지 <교회와 민족> 편집장인 롱(Pierre Nguye Than Long)씨가 그들이다. 이들을 통해 베트남 사회와 교회의 모습을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한국 교회에서 YCS는 보통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지만 베트남을 포함해 다른 외국 교회의 경우 대부분이 대학생이거나 졸업생이다. 이제 50대 후반의 둥 간사 자신도 YCS 출신이라고 했다. YCS 활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둥 간사는 40년 가깝게 YCS와 함께 해온 베트남 YCS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자그마한 체구의 둥 간사가 들려주는 얘기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나 남베트남 정부 시절에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부자들과 권력을 가진 이들과 가까이 하여 교회 자신도 특권층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교회가 누린 특권과 부는 1975년 공산정부가 들어서면서 몰수당했다. YCS 센터도 정부에 몰수됐고 현재 “YCS 전국 협의회" 사무실 공간으로 쓰고 있는 호치민 건물로 이전한 뒤 몰수당하지 않기 위해 일종의 ”제조 회사“로 신고했다고 한다. 둥 간사에 따르면 교회 그룹만이 아니라 서류상으로 베트남에는 200여개의 비정부기구(NGO)가 등록돼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경제적 개방과 개발은 허용하되 정치적 자유는 그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통제하고 있는 베트남 공산정권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1990년대초 베트남식 개혁개방정책인 “도이 머이”(쇄신)를 채택한 이래 교회 재산을 돌려주고는 있지만 아직도 정부 통제 때문에 YCS 활동은 통제가 심해서 관에서 인정한 단체(이를테면 “적십자” 비슷한)나 그밖의 다른 사회기구 이름으로 한다고 했다. 현재 YCS는 “가상”으로만 존재하는 전국협의회 아래 7개 그룹이 있고 이 그룹들 밑으로는 10-20명으로 이루어진 여러개의 세포조직이 있다고 한다. 전국조직은 불법이어서, YCS 회원 사이에서만 전국협의회는 존재하고 그 대표가 둥 간사이다.

주간지 <교회와 민족>

1975년 혁명 뒤에 YCS나 가톨릭노동청년회(JOC) 같은 교회내 “진보세력”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과 공산당 정부의 방침에 호응해 그동안 교회가 가진 자의 편에 서왔던 것을 반성하고 가난한 이들과 사회 발전을 위해 참여할 것을 제창했다. 그러나 여전히 보수적인 기존 교계의 뿌리가 잔존하고 있어서 YCS나 JOC는 교회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여겨진다고 한다. 한편 공산정부는 종교, 특히 정부가 공식화한 5대 종교가운데 하나인 가톨릭이 인민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늘 감시하고 통제하고 있어서 둥 간사의 경우에는 교회에서도 또 정부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경계인“으로 지난 30여년을 살아온 것이다.

둥은 YCS 간사이면서 동시에 “연대와 발전”이라는 4개 단체들이 모여 일종의 지역개발 사업을 한다. 여기서 둥 간사는 80-90명의 가난한 지역 젊은이를 고용해 옷을 만들어 모두 유럽으로 수출한다. 이들 가운데 20-30명은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면서 기술을 가르치는 일종의 기술직업훈련원을 운영한다. 그러니까 그가 일하는 공간은 YCS 전국협의회 공간이면서 직업훈련원이기도 한 것이다.

평신도 활동가의 경우, 둥 간사처럼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던 역사는 <교회와 민족>지 롱 편집장에게도 같은 대가를 요구했다. 이 주간지는 베트남의 평화와 독립, 화해를 위한 투쟁을 후원하던 한 베트남 가톨릭인이 1968년 파리에서 처음 발행했다. 처음에는 종교잡지보다는 미국 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민족적 성격이 강했지만 1975년 혁명 뒤로는 차차 교회의 잡지 모습을 갖추어 왔다고 한다. <교회와 민족>은 1975년 4월 베트남전쟁이 끝나자 베트남으로 옮겨와, 1975년 7월부터 호치민시에서 발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3년, 이 주간지는 베트남 언론법에 따라 “베트남 조국전선”의 보호 아래 있는 정부 승인 기구인 “가톨릭연대위원회”의 기관지가 되었다. 따라서 교계 성직자들은 롱 편집장을 늘 곱지 않은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고, 한편 정부는 가톨릭교회에 영향력을 끼치면서 때로는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논조의 글도 싣는 이 매체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롱 편집장은 <교회와 민족>의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아직도 일반 인민이 가톨릭을 “친미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이들에게 “민족을 위한 가톨릭교회”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호치민으로 옮겨 온지 올해로 33년째 되는 이 잡지의 책임자인 롱은 외롭고도 위태로운 “줄타기”에 성공하여 교회로 하여금 1980년 주교회의 총회 때 가톨릭이 “민족과 인민”을 위한 종교로 거듭날 것을 결의하게 하는 데에 한 몫을 하였고, 교회에서는 공산당 “기관지”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베트남 교회 소식을 전하는 매체이자 만남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회와 민족>의 이런 노력은 국제가톨릭 매체들 사이에서도 인정을 받아, 2001년 국제가톨릭신문출판협회(UCIP)로부터 금장을 받게 된다.

현재 매주 14,000부를 찍고 있는 이 32쪽짜리 주간지는 베트남교회와 세계교회 소식, 주일복음 해설, 베트남의 종교인 및 일반인과의 인터뷰, 교회의 화제기사, 그리고 사회경제와 종교, 노동, 가족 등의 문제, 편집자에게 보내는 글 등 폭넓은 소재를 다룬다. 한국 교회도 매주 10만부가 넘는 주간지가 2개씩이나 되지만, 교회를 향한 생산적인 비판의 글을 전혀 싣고 있지 않는 현실에서 롱의 <교회와 민족>은 우리의 모범이자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나는 끝으로 롱 편집장에게 교회와 정부 양쪽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재정은 어떻게 꾸려가냐고 물어봤다. 그는 사람좋게 웃으며 “뭘 그렇게 기자처럼 꼬치꼬치 캐묻냐”면서, 주간지 구독료와 잡지사 건물을 다른 사무실로 임대해줘서 벌어들이는 임대료 등으로 충당한다고 했다. 나중에 만남을 주선한 땀은 프랑스와 베트남에서 롱을 지원하는 성직자와 후원가들이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그랬다. 후원자 없이 어떻게 그토록 오랜 세월을 지탱해 올 수 있으랴! 어려운 상황 속에서 30년이 넘게 잡지를 이끌어온 롱 편집장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오는 길에 땀은 아마도 YCS 둥 간사나 롱 편집장도 있는 말 전부를 털어 놓은 것은 아닐 거라고 했다. 오랫동안 경계인으로 살아서 그런 태도가 습성화됐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도 늘 그런 식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시인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읊었을까? 이들의 앞길에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빈다.

/황경훈(우리신학연구소 아시아신학연대센터 실장) 2007.12.07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