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이동화]

고백하건대, 지난 대선 직후 나는 새 정부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랐다. 경제민주화와 복지 등 자신의 공약을 잘 지켜내고 성공한 정부가 되기를 바랐다. 독일 같은 경우 민주적 시장경제가 보수정당인 기독교민주당 시절 발전했기에, 새 정부는 이념 논쟁이나 조세 저항 등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개혁적 조처들을 시도하고 안착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그런 의미에서 지지받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아 개혁적 공약은 예전의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로 회귀했고, 정치뉴스는 국정원과 간첩조작으로 도배되었다. 새 정부의 성공에 대한 기대는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신뢰, 아니 사실은 민주주의에 대한 착시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 때부터 몇몇 징조가 보였지만,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피로 이루어낸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쉽게 후퇴하고 무너지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관점과 내용은 정반대이지만,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착시 현상은 또 있다. 국정원의 불법 선거 개입이 밝혀지면서, 전국의 정의평화위원회와 정의구현사제단을 중심으로 한 한국 천주교의 문제제기에 맞서 기득권 매체가 쏟아내는 입장이다.

이미 한국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시절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도 지나칠 만큼 차고 넘치고 있으며, 언론의 자유도 너무 과도해서 문제란다. 따라서 권위주의 시절의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상당히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염수정 추기경은 교황청 관보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와의 인터뷰에서 기득권 매체의 주장을 거의 되풀이하다시피 했다.

▲ 지난 2일 주교좌 의정부성당에서 천주교 의정부교구 사제연대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미사를 봉헌했다. ⓒ문양효숙 기자

민주주의가 자리 잡았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입장은 민주주의 무용론으로 이름 붙여 볼 수 있겠다. 민주주의 해봐야 별거 없더라,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나, 오히려 독재가 더 좋더라는 입장이다. 솔직해서 좋긴 한데, 이것 역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내용이야 어찌됐건 우리 모두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기정사실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견고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오해하게 된 것은 민주주의가 법률과 제도로서 자리 잡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민주주의를 “절차”와 “제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정치학자들이 말하듯, 보통선거권, 주기적인 선거, 정당 간의 경쟁을 통한 정부의 구성 등 절차적 최소 요건을 갖추는 것이 기본이기는 하다. 그러나 한때 인류를 암흑으로 몰아넣었던 파시즘 체제도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괴물이었다. 민주주의를 내용보다는 형식과 제도로 이해한다면 괴물을 앞에 두고도 괴물인지 모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토크빌(A. de Tocqueville)이 지적했듯이 ‘사회의 상태’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상태와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한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한 토대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또는 민주화는 이전의 구체제(앙시앵 레짐)를 전복하고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구체제를 전복했던 경험을 가지지 못했다. 봉건왕조를 단두대로 보내지도 못했고, 일본 제국주의를 우리 힘으로 쫓아내지도 못했으며, 권위주의적 군사독재를 퇴출시키지도 못했다.

4월 혁명 이후에도, 유신독재 이후에도, 그리고 6월 항쟁 이후에도 반공과 국가안보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구체제는 언제나 한국 사회의 주류였다. 반대로 민주주의를 요구한 민중 또는 시민 세력은 언제나 자신의 정치적 이해와 의사를 대표하는 정치결사를 가지지 못하고, 정치 엘리트들에게 흡수당하거나 주변부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쟁취하고서도 실질적 민주주의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구체제와의 단절 없이, 구체제의 정치세력과 동거하고, 그들의 힘을 막아낼 정치적 주체가 제대로 없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런 요인들이 형식적 민주주의마저 후퇴시킬 충분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톨릭교회, 민주주의가 공동선을 향해 나가도록 분명히 해야

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의 경제 재편에 맞물려 시작되었다. 유신 때부터 성장해온 독점기업 집단을 제어할 힘을 한국의 민주주의는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변변한 분배정책이나 복지정책 한번 해보지도 못했다. 이런 면에서 ‘민주주의 해봐도 별거 없더라’는 말이 언뜻 이해되기도 한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기득권의 퇴행성 레토릭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절차와 제도 너머에 있는 것이다. 단순히 민주적 제도와 절차가 목적이 아니라 그러한 수단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 평등, 자유, 참여를 확대시키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가톨릭교회는 참다운 민주주의가 절차와 제도를 넘어 공동선을 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참된 민주주의는 단지 일련의 규범들을 형식적으로 준수한 결과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존엄, 인권 존중, 정치 생활의 목적이며 통치 기준인 공동선에 대한 투신과 같이 민주주의 발전에 영감을 주는 가치들을 확신 있게 수용한 열매이다. 이러한 가치들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가 없다면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는 상실되고, 그 안정성도 위태로워진다.” (간추린 사회교리 407항)

반복이 되긴 하겠지만, 지속적으로 실질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없다면 제도와 절차로 갖추어진 민주주의는 언제라도 후퇴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너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얻은 깨달음이긴 하지만.


이동화 신부 (타라쿠스)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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