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4월부터 양운기 수사의 칼럼 ‘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를 4주 간격으로 싣습니다. ―편집자

지난 2007년 4월 26일 저녁 제주 강정마을 2,000여 명의 주민 중에 고작 80여 명만이 모여서 당시 마을 회장의 주도하에 해군기지 유치를 표결도 없이 결정해버렸습니다. 후에 긴급히 열린 마을 비상회의에서 당시 마을 회장은 탄핵을 당하고 다른 마을 회장이 선출되었습니다만 당시 1,900여 명의 주민들은 회의 공고기간도, 회의에 대한 고지도, 회의가 열리는 것도 모른 상태였습니다. 당시 김태환 도지사와 마을 회장이 다수의 주민들을 빼돌리고 80여 명으로 날치기 사기를 친 사건을 현재 국가는 국책사업이라고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유지된 지역공동체의 평화가 국가의 폭력과 사기로 한순간에 사라지고 주민들이 옥토를 빼앗겼다는 것, 옥토를 수용당하고 보상금 몇 푼을 주겠다는 국가의 폭력 앞에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매일 오전 11시면 어김없이 생명평화미사가 봉헌됩니다.

▲ 예수 부활 대축일이었던 지난 20일, 강정마을 생명평화미사에 참석한 사제와 지킴이들이 제주 해군기지 공사장 앞에 앉아 있다. ⓒ문양효숙 기자

또한 이 미사는 정당한 절차 없이 진행되는 해군기지 건설의 부당함과 해군기지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전쟁 영향력을 극대화시킨다는 것, 동시에 군사력 증강이 동아시아의 긴장을 고조시켜 결국은 전쟁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사실 강정의 해군기지는 한미 공동 해군기지이며,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군사지배정책으로 강정마을 주민들에게는 환경적 · 문화적 · 정치적 · 사회적 재난 등을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빼앗긴 강정 주민들과 함께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를 고발하고,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대한 조공으로 희생되는 강정의 주민들과 함께 ‘전쟁기지는 결코 생명을 지키고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애써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매일 오전 11시, 강정의 평화를 위한 시간

비바람이 불어도, 눈이 와도 11시가 되면 의자를 들고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 앞에 앉아서 미사를 봉헌하며 기도합니다.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와 종교 예배시간을 보장받기 위한 과정이며 미사 시간 만큼이라도 공사를 막아보려는 눈물겨운 의지의 표현입니다. 또한 오랜 세월 가꿔온 지역공동체와 삶을 빼앗긴 동토의 땅 강정이 거대한 권력의 부당한 횡포에 맞서 저항하며 신음함에 함께하기 위해서입니다. 권력 앞에 꺼져가는 피조물, 환경, 생명체들의 통곡을 마음으로 들으며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라도 함께해야 맘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경찰이 다가와 형법 314조, 업무방해죄로 체포하겠다고 협박하며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를 들고 길가 구석으로 밀어내고 감금하고 체포해갑니다. 공사 차량의 진입을 막고 있어 업무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업무방해라 주장하겠으나, 강정마을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주민 생존 방해’이며 ‘국가의 폭력’일 뿐이며 강도의 무리이며 그 대리인입니다.

그때도 그랬습니다. 스승 예수님께서 빈곤한 과부의 헌금 렙톤 두 닢을 칭찬한 것을 예루살렘 권력은 업무방해라 했습니다. 보리빵 몇 개로 수천 명을 먹였을 때도 예루살렘의 권력과 그 대리인들은 자신들의 업무를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한 것은 그들 권력자들의 입장에서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대형사건입니다. 초조하고 불안한 권력은 예수님을 감금하고 체포할 기회를 찾을 수밖에 없었고, 수차례 경고하며 잡아들일 명분을 쌓았습니다. 지금 해군지기 앞에서 미사 시간에 의자를 들고 길가 구석으로 밀어내고 감금하고 형사처벌을 통보하는 모습과 한 치 다르지 않습니다.

스승님께서 베싸이다의 시각장애인을 눈뜨게 한 것, 이것은 결정적 업무방해였습니다. 아니, 업무방해 무리들을 집단으로 양성한 국가보안법 위반이며 특수공무집행방해였습니다. 베싸이다의 시각장애인이 눈뜰 때 그 순간 우리도 ‘국가의 폭력이 무엇인지, 왜 국가의 폭력에 저항해야 하는지, 주민이 권리가 무엇인지’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연약하지만 비폭력의 위대한 힘에 눈떴고 하느님의 뜻을 따름이 무엇인지, 그분의 제자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명이 무엇인지’ 그 순간에 눈떠 버렸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스승님 희생의 대가’라는 진리에 눈떴고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 없이 비폭력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눈떴기에, ‘비폭력의 무궁한 힘에 비하면 예루살렘의 폭력은 한 줌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기에 로마와 예루살렘 권력은 초조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분을 감금했고 체포하여 죽인 것입니다.

▲ 지난해 9월 강정마을 제주 해군기지 공사장 앞에서 ‘제주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천주교연대’ 2주년 기념 미사가 봉헌됐다. ⓒ정현진 기자

빼앗긴 사람들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처럼

스승님 그분은 가난하셨기에 가난한 사람을 좋아하셨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나누어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더 가지는데 불편해졌기 때문에, 더 가지려는 예루살렘 권력에게는 업무방해입니다. 예수님은 빼앗는 사람을 싫어했기에 빼앗는 것을 일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한 것이고, 빼앗겨서 실향민이 되어버린 갈릴래아 사람들 편에서 빼앗긴 사람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로마와 예루살렘에 삶을 빼앗긴 갈릴래아, 미국과 국가와 자본이 결탁한 권력에 삶을 빼앗긴 강정, 시대는 다르나 같습니다. 이처럼 빼앗긴 사람을 사랑한 죄, 결국 그로 인해 예수님은 감금 당하고 체포 당하고 사형을 당했습니다.

우리를 감금한 경찰을 비집고 나와 공사장 정문 앞에 다시 앉아 미사를 계속 봉헌하며 기도합니다. 경찰은 다시 업무방해와 형사처벌을 통보하고 길 구석으로 밀어내어 감금하고 체포하고 유치장에 수감합니다. 이렇게 반복되고 얼마 후면 경찰의 출두 요구서를 받고 제주지방법원에서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습니다. 벌금형을 선고받거나 법정구속되기도 합니다. 비폭력저항의 결과이지만 그분, 스승님처럼 사형은 당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오전 11시가 되면 어김없이 그분과 동행합니다. 그분의 감정과 슬픔을, 그분의 마음과 인간됨을, 그분의 고통과 죽음을 마주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분의 영광스런 부활을 함께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이 기쁨의 순간은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열리는 영원의 공간이며 그러기에 어떤 형태의 권력도, 공갈협박도 결코 막을 수 없는, 믿는 이는 알 수 있는 무한한 공간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기쁨이고 영원이고 부활이며 그것은 그분이 걷고 계신 길이며 그분의 삶 전부입니다.

아! 이렇게라도 그분을 만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이렇게라도 그분을 만나지 않으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없는 이 슬픔과 분노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양운기 수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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