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간청하고 싶다, 세상의 모든 매체들에게. 제발, 기사들을 내려다오. 원하는 사람만 찾아들어가 볼 수 있게 배치라도 바꿔다오. ‘세월호’에 대한 그 모든 뉴스를, 차마 볼 수가 없다. 이건 고문이다. 폭력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켜는 순간 맨 위 상단에 떠 있는 ‘속보’를 하루 종일 무방비로 봐야 한다니! 심지어 내내 미동조차 않는 ‘속보’의 변함없는 숫자를 굵은 글씨로 봐야 하는 참혹함은 견딜 수가 없다. 잠시라도 안 볼 수 있는 자유는 없는가.

적당히 괴로워야, 뉴스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깨닫는다. 적어도 다른 나라 이야기라든가, 아직 대비할 시간이 충분히 있어 보인다든가, 왠지 모르게 나와는 무관해 보이는 구석이 있어야, ‘뉴스’라는 걸 볼 수 있는 거였다. 그래야 시시각각 쏟아지는 ‘속보’라는 걸 쳐다보고 있을 수 있다. 나와 조금의 거리라도 있어야, 그것을 ‘뉴스’로서 볼 수 있다. 당장 내 문제로 실감되면, 그냥 공포이며 몸과 마음이 완전히 마비될 지경이 된다.

차마, 볼 수가 없다. 아이들을 수백 명이나 바다에 두고, 우리가 하늘 아래 머리를 들고 여전히 살고 있다. 이럴 수는 없다. 바다에 빠진 아이들을, 마치 튼튼한 지붕 있는 미아보호소에라도 맡겨 놓은 듯이 태연하게 ‘실종자 수’를 헤아리고 있다. 제정신인가.

얼마나 잔인하기에 이런 뉴스들을 쏟아내고 있는가? 뉴스를 생성시키는 프레임이 너무나도 사악하다. 극도로 적은 ‘사망자 수’와 대단히 엄청난 ‘실종자 수’……. 무엇을 위해 이런 숫자놀음을 하고 있는가? 바다가 육지인가? 아이들이 어느 안전한 섬에서 ‘정글의 법칙’쯤 되는 무슨 생존투쟁이라도 벌이고 있을 것 같은가? 그리 낭만적 환상에 취한 채 뉴스를 소비하라는 뜻인가? 정말, 왜 이러는가?

▲ 세월호 침몰 사고에 관한 18일자 YTN 뉴스 특보 영상 갈무리

할 수만 있다면 이 뉴스로부터 도망가고 싶다. 생각 안 할 수만 있다면 뭣에라도 몰입하고 싶다. 그런데 불가능하다. 미칠 것 같아서 컴퓨터를 끄고 싶다. 귀를 막고 싶다. 하루 종일 거의 바뀌지도 않는 숫자를 ‘속보’랍시고 띄운 채 멎어 있는 화면이 우리를 옥죈다. 아무리 외우려 하지 않아도 숫자가 머리에 와 박힌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너무, 너무 숫자가 많다. 숫자를 인지하고 나면, 견딜 수가 없다.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한 명 한 명의 그 귀하디귀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부모와 그 가족들의 숫자를 대충 어림만 해봐도 돌아버릴 것 같다.

그냥 다 거짓말이면 좋겠다. 그 하늘도 바다도, 수학여행이란 단어도, 배, 실종, 구조……. 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얘들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 사태를 감당할 자신이 없구나. 이 숫자들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지 않기만을, 그전까지만이라도 좋으니 도망가고 싶다. 우리가 이 시간들을 감당해낼 수나 있는 것일까. 무섭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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