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 흘러가는 노래 - 12]

ⓒ박홍기
카타리나 씨는 50대 후반의 여성이다. 그녀는 일찍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소박하고 신실하게 신앙의 길을 걸어왔다. 한적한 농촌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카타리나 씨는 성당에서 교우들을 만나 미사를 드리고 어울리는 것이 무척 소중하고 즐거운 일이다. 성가대에서도, 신심단체에서도 신앙심 좋고 능력 있는 직업여성이라고 칭송이 자자하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홀로 살고 있지만 가끔 다가오는 외로움도 이런 분위기 덕분에 잘 견뎌내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그녀에게 우울한 소식이 들렸다. 같은 마을에 사는 청년인 재민이(가명)가 26살의 꽃다운 나이에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재민이의 할머니를 잘 알고 있었고 재민이의 집안 사정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재민이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할머니와 함께 지적 장애를 가진 어머니를 돌보며 살았다.

어려운 살림에 학교를 휴학하고 돈을 벌어 오겠다며 서울로 떠났던 재민이가 마을에 다시 돌아온 것은 1달여 전이었다. 할머니를 통해 들으니 전문대학을 다니느라 대출받은 학자금과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다단계 사업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사채를 쓰게 되었는데, 빚을 갚을 길이 없자 사채업자에게 폭행까지 당했다고 한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온 재민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나는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어”라고 한탄하던 것이 재민이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고 한다.

재민이 할머니의 눈물어린 탄식을 들으며 카타리나 씨는 부끄럽고 죄송스런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신은 주말이면 서울의 노래 모임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즐기고, 돌아오는 길에는 감실에 보석이 박혀 있다고 소문난 강남의 멋진 성당에서 공연을 보고 오곤 했다. 이태리로 성지순례 갔을 때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약탈해온 금으로 천정을 도배했다는 성당을 구경하며 황홀한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재민이네 사정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친척들이 도와주겠지. 젊으니까 잘 살아가겠지’ 하고 외면한 채 그렇게 자기 생활에만 빠져있는 동안 아까운 젊은이가 세상을 버린 것이다. “내가 왜 재민이를 도울 생각을 못했을까.” 카타리나 씨의 슬픈 사연을 바라보면서 최근 우리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세 모녀 자살 사건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2년 통계청의 사회 조사에서도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의 40%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답했다.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었다’고 응답한 사람 가운데 20대의 28.7%, 30대의 42.6%, 40대의 51.5%, 그리고 50대의 52.6%가 생활고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런 수치들은 2008년 통계청의 사회 조사보다 훨씬 증가한 것이다.

한쪽에서는 세계 경제 7위권 진입을 외치고 유사 이래 가장 잘사는 시대라고 손나발을 불며 찬양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매일 40여 명의 사람들이 힘들어 못살겠다며 세상을 버린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표현한 것처럼,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사회이며, 한쪽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한쪽에서는 음식이 버려지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는 이런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교회에는 카타리나 씨처럼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정화하여 개인적인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다. 온유하고 자비한 태도로 세상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겠다는 착한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주리고 목마른 자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은 교회 내에서도 강경론자로 매도되고 있다. 친구와 부유한 이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자주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는 이들,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교황의 권고는 아직도 문밖에서 찬바람을 맞고 떨고 있다. 형제적이고 정의로운 구조를 통해 이 세상이 하느님의 현존을 향해 개방되도록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여전히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거친 길이다.

재민이는 자살하기 며칠 전에 교회에 다녀갔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던 재민이는 텅 빈 교회에서 하느님께 뭐라고 했을까? 탐욕과 거짓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세상에게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라고 요구하지 말고,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교회가 나 같은 약자들의 피난처가 될 수는 없겠냐고 울부짖지 않았을까? 염치나 양심의 가책도 없이 불의하고 무정하게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짓밟고 외면하는 세상을 제발 고쳐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을까? 그의 절망과 분노가 오래도록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이장섭 (이시도로)
아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주님을 찾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