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세월호 사고 피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어제 전남 진도군 병풍도 북쪽 해상에서 대형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는 사고는 온 국민들에게 충격과 슬픔을 줍니다. 제주도 수학여행 길에 오른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을 포함한 승객들이 참변을 당했습니다. 진도 바다에서 사고를 당한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만 280여 명으로 이중 240여 명이 단원고등학교 학생들로 집계되고 대규모 희생이 우려되어 기도하게 됩니다.

‘생때같은 학생들 살려주세요!’
‘주님,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사고당한 이들이 바다 속에서 얼마나 춥고 불안에 떨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고 또 아픕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켜보는 사람들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갑니다.

▲ 지난 16일 전남 진도군 관매도 인근 해상에서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로 향하던 고교생 등 477명이 탄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한 가운데 17일 오전 침몰한 세월호 사고 해역에서 해양경찰과 군이 실종자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오늘은 어제가 없었으면 없는 날입니다. 또 내일이 없다면 오늘은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제, 오늘, 내일은 서로 동떨어진 ‘다른 날들’이 아닙니다. 믿기 어렵고, 믿고 싶지 않은 오늘의 대형 해상(海上) 참사는 과거와 이어져 있습니다.

나는 이 나라를 살면서 연일 계속되는 사건사고의 연속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나의 기억에 남는 대형사고로 1990년대 초중반엔 서해 훼리호 사고,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1994년, 32명 사망),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1995년, 101명 사망),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501명 사망) 등 후진국형 사고가 잇따랐습니다.

지난 과거의 어제는 오늘의 어제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면서 내일의 어제요, 내일은 오늘의 내일입니다. 오늘의 이 처참한 현실은 내일을 밝지 못하게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때는 다만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의 이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분석하여 사고를 막고 유사시에는 신속하게 대처할 위기 대처 매뉴얼을 만들어, 국민은 국가를 믿고 국가는 국민을 신뢰하는 나라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재난 시스템을 근본에서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오늘은 모든 어제와 모든 내일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영원한 오늘’입니다.

서해 훼리호 사고가 일어난 1993년의 국민 1인당 GDP는 8,422달러였다고 합니다. 재난으로 뒤범벅된 1990년대를 한 해, 한 해 넘길 때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에는 늘 무능한 정부를 보고 국민들의 가슴은 멍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경제성장으로 1993년의 3배 정도인 2만 6,000달러에 들어선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이없는 사고를 다시 지켜보고 있습니다. 경제적 환경을 비롯한 여러 분야가 첨단 환경으로 바뀌었지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무능한 정부는 여전합니다.

대한민국은 거의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했다며 자랑합니다. 분야에 따라서는 우리가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조선(造船) 분야만 해도 건조 물량과 기술에서 세계 1위 수준에 올라섰습니다. 그러나 ‘세계 1위’, ‘경제성장’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이렇듯 번드르르한 포장에 불과합니다. 이 나라의 거품을 걷어내고 나면 그 안의 알맹이가 어떤 수준인지 세월호 사고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24장에 보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시고 나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마태 24,32-34)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세대’는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의 당 세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나에게도 지금 이 세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말씀하신 ‘이 세대’와 오늘의 ‘이 세대’는 조금도 다르지 않는 같은 세대입니다.

사람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숱한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파도처럼 밀려오는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에서 그 사람의 인생철학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로 복잡한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기보다는 그 많은 문제를 파생시키는 문제 ‘하나’를 해결하라는 지혜를 주십니다.

옛말에 ‘물유본말(物有本末)하고 사유종시(事有終始)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건에는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을 가려서 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를 전제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일의 근본에는 사랑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예의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사랑하는 평화정신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이웃’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앞에 두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마태 22,37-39)

“모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 (히브 11,3)

보이지 않는 뜻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먼저입니다. 그 마음으로 모든 일을 풀어내야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생깁니다. 인간 세상의 온갖 비극과 곤경이 바로 이 선후의 뒤바뀜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지금 시대의 상황은 어떻게 뭘 해야 할지 캄캄합니다. 나는 이런 어둠의 상황을 한 번도 스스로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이겨낼 만한 능력이 나에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어떤 의미로는 극복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 넘어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온 것입니다. 궁지에 몰려 앞이 안 보였을 때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때그때마다 인생의 새로운 문이 열리는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막혔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열리는 체험입니다.

사실 남이 보는 나, 세상이 보는 나보다 하느님이 보는 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는 오로지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가 중요했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점은 다음 순서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우주보다 귀한 존재로 보십니다.

하늘 땅 그 무엇보다 귀한 생명들이 하루빨리 구출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목에서 오늘도 기도하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어 봅니다.
 

 
 
최민석 신부 (첼레스티노)
광주대교구 현애원 담당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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