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10]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주어라.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신명기 6,4-9)

이 구절은 나라 없이 수천년을 떠돌던 유대인들을 지켜주던 구절이다. 그래, 하느님은 한 분이야, 다른 것은 결국 헛것이야,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해, 하며 신앙을 지켜왔다. 쉴 때는 물론 일할 때, 잘 때는 물론 일어날 때 거듭 기억해야 하는 내용이고, 손과 이마에 붙여 기억하고 실천하겠다는 다짐으로 삼아야 하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구절이다. 이것이 유대교의 기본 정신인 것이다. 이 정신은 예수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마르코 12,29)

예수도 유대인으로서, 조상들과 동일한 가르침 위에 있었다. 그러다보니 예수에게서 비롯된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신앙고백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께서 결정적으로 드러내고 알려주셨다고 믿는 것이다.

무슬림(이슬람신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게도 첫째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고백이다. 유대인들처럼, 아이가 태어날 때 귀에다 속삭이고 사람이 죽을 때도 선포한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것만은 알고 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종교들의 가르침이 똑같은데도 이들 간에는 갈등과 알력이 끊이지 않는다. 왜인가? 그것은 하느님이 한 분이라는 말을 이해보다는 오해하기 때문이다. 한분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첫째, 하느님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있다는 말이다. 모든 사물들이 제각기 따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모든 것은 하느님을 한 뿌리로 하여 살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이가, 모든 것이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는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사도행전 17,28) 그러니 하느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 무소부재(無所不在)가 말하는 것도 그것이다. 하느님은 마치 자연법칙과도 같다. 자연법칙 자체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눈으로 보고자 하는 행위 자체가 자연법칙에 따르는 것이다. 자연법칙은 듣고 만질 수도 없다. 듣고 만지고자 하는 행위 자체가 자연법칙에 따른다. 하느님은 자연법칙과도 같다고 이해해도 90%는 맞다. 그것이 신을 하늘에 있는 최고신처럼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바른 이해이다.

둘째, 어떤 존재자도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설 수 없다는 뜻이다. 하느님보다 위에 둘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섬길 것,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느님 한 분뿐이라는 것이다. 일반화시켜 말하면 생명, 정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는 뜻도 된다.

셋째, 하느님이 인간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매사를 자기의 이기적 욕구에 따른 기준에 두니까 욕구 충족의 상황이 조금만 달라지면 흔들린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주기도문)며 기도한다. 왜 시험에 드는가? 왜 유혹에 빠지는가? 기준이 자기한테 있기 때문이다. 신이 한 분이라는 것은 진리의 기준이 하나라는 말이다. 하느님이 없는 곳에 유혹이 있고 시험이 있는 것이다.

적어도 통계상으로는 지구상 인구 거의 절반이 이 가르침에 따르고 있다. 그런데 왜 갈등이 끊이지 않는가? 특히 왜 종교전쟁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라는 숫자를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 ‘하나’는 여러 가지 것 중에 일부로서의 하나가 아니다. 도리어 하나는 전체이다. 동양의 고전인 <장자>에 이런 말이 있다: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으니 그것을 ‘큰 하나’(至大無外 謂之太一)라고 한다. 지극히 작은 것은 안이 없으니 그것을 ‘작은 하나’라고 한다(至小無內 謂之小一). 두께가 없어 쌓을 수 없이 작은 것도 (작은 하나의 입장에서 보면) 천리 크기가 되고, (큰 하나의 입장에서 보면) 하늘과 땅도 낮고 산과 호수도 평평하다.(<莊子>, 雜篇 天下)

여기서 말하는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다’는 말,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한 분 됨을 가장 잘 말해준다. 밖이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뜻이다. 밖이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은 전체라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는 전체이다.

하느님은 “없는 곳이 없다”(無所不在)는 말도 그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곳에 계시니, 이 말 그대로 모든 곳에서 하느님을 본다면 도대체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특정한 곳에서만 하느님을 보니까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게 되고 전쟁까지 불사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는 이 오래된 습관이 생명의 살상까지 낳는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종교 전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진리의 자기중심적 판단의 결과인 것은 분명하다. 이런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보니, 그리스도교나 이슬람이 도리어 인간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모순을 낳고 있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오로지 이 잘못된 ‘하나’라는 숫자 개념에 매어 다른 종교인들을 우상숭배니 뭐니 하며 매도하고 배격하게 된다는 말이다.

성서에는 하느님의 순수한 가르침과 그 가르침이 왜곡된 대중의 역사가 동시에 들어있다.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그것을 구분해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유대인이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전쟁을 벌인 이야기는 유대인의 신앙이 확립되어 가고 유대국가가 건립되어가는 역사 차원에서 보아야지, 신념이 다르다고 인간을 죽여도 좋다는 진리의 선언으로 알아들으면 곤란하다. 성경 전체가 일점일획도 하느님의 말씀이라면서 그 안에 전쟁 이야기 같은 것 까지 하느님의 말씀이라며 살인과 침략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다른 것은 다 이론이라고 쳐도 하나만큼만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참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모든 곳에서 하느님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지는 것이다. 하느님은 자연법칙과도 같다. 자연법칙이 작용하지 않는 곳이 하나나 있는가? 그렇듯이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내가 유혹당하는 곳에는 같이 유혹 당하면서 이겨내기를 바라며 계시고, 심지어는 전쟁의 폭풍 속에서 전쟁의 고통과 함께, 전쟁이 끝나시기를 바라며 계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길이다. 이것을 아는 이가 하느님 나라에 ‘가깝다’.(마르코 12:34) 그리고 이것을 실천하는 이는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다”(로마서 11,36) 하지 않던가. 하느님은 만물이 나오고 통하고 지향하는 곳이라는 이 구절이야말로 하느님이 한분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찬수/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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