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신문을 통해 보는 한국 교회]

주교회의는 지난 3월 춘계 정기총회에서 ‘주일 미사와 고해성사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 공동 사목 방안’을 승인했다. 주교회의는 ‘부득이한 경우’에 해당하는 일을 해석하고 그로 인한 ‘죄의식’에서 ‘해방’되는 ‘사목적 안내’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단어 하나마다 고심한 흔적이 역력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평화신문> 2014년 3월 30일자 1면 커버스토리
단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고해성사’ 특집

3월 30일자 <평화신문>에서는 ‘커버스토리’ 기획기사의 주제로 고해성사를 다뤘다. 관련 기사들은 1면, 13~15면에 걸쳐 고해성사의 여러 면을 심층 취재했다. 그러나 커버스토리의 원조격인 <가톨릭신문>에서는 6년 전인 2008년 8월 17일자 커버스토리에서 역시 고해성사 주제를 놓고 거의 같은 내용으로 4개 면(1면, 11~13면)을 할애해서 보도한 바 있다.

두 신문만을 놓고 본다면 적어도 6년 동안 한국 천주교회의 “냉담 원인 1순위”(가톨릭신문 11면)라는 고해성사에 대한 사목적 시도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난 6년 동안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고문실 혹은 하숙방

가톨릭교회의 교리 중 금지옥엽은 뭐니 뭐니 해도 ‘칠성사’에 대한 것이다. 익히 아는 대로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가 그것이다. 그중의 하나인 화해의 성사라고 불리는 ‘고해성사’의 보이지 않는 벽을 성직자는 성직자대로,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사제의 고백대로 ‘주일미사 불참죄’와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만이 반복되는 하느님과의 대화방인 고해실이 성직자에게는 청각테스트를 하는 고문실로, 평신도에게는 죄와 벌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라스콜리니코프의 어두운 하숙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왜?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21항 고해성사 규정

▲ <가톨릭신문> 2008년 8월 17일자 1면 커버스토리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발표한 “고해성사의 기원이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법에 기원이 있다”는 말에 대한 해석 여부는 신학자들이 몫이겠지만 트리엔트보다 300여 년 앞서 열린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에서 규정한 제1항 ‘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를 비롯한 71개 항목 중에 들어 있던 제21항을 우리는 기록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 내용은 ‘신자들은 일 년에 한번 개인적 고백을 수반한 고해성사와 적어도 부활축일에 한 번 영성체 할 의무가 있다’이다. 라테란의 71개 항목 중 놀랍게도 현재까지 고수되고 있는 것은 제21항 고해성사에 대한 규정 하나뿐이다.

사실 당시의 규정 안에는 성직자들의 유혈결투 금지(18항)와 성당 참사들의 사생아들이 같은 성당의 참사가 되는 것을 금지(31항)하는 것뿐 아니라 제5차 십자군 파견(71항)과 같은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 고백을 수반한 고해성사의 규정은 고스란히 놀라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로마보다 더 로마스러운 한국 교회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미사의 참회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화해,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을 교회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체험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인의 신앙 형태와 맞지 않다면 열 번 아니라 백 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마치 십계명처럼 고해성사도 그런 불변의 교의로 여기며 굳은 관행을 반복하는 것만이 충실한 신앙 행태는 아닐 것이며, 그러한 관행의 답습만이 교회의 교사로 불리는 주교들의 ‘사목적 배려’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용서하시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통하여 새로운 실천을 할 수 있을지 그것에 대한 복음적 노력, 시대적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는 말했다.

“해마다 고해성사를 받으라는 교회의 계명은 주관적으로도 자각한 중죄를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구속력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어서는 안된다. …… (미사의) 참회 예절이 성사적 성격을 띨 수 없다는 것은 교의가 아니다. …… 주일 계명을 마치 시나이 산에서 영원한 신적 계명으로 선포된 것인 양으로 내세워서는 안된다.” (<교회의 미래상>, 분도출판사, 1981, 180~181쪽)

진정 용서 청해야 할 죄는 무엇일까?

조류 바이러스라는 죄(?)로 천만 마리가 넘는 날짐승을 살처분하고도 “적어도 저는 오늘도 살인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안심하며 잠자리에 든다면, 줄 잘못선 죄(?)로 비정규직에 있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를 이웃에 두고서도 “적어도 저는 오늘도 다른 사람의 재물을 탐내지 않았습니다”라고 아침 기도를 드린다면, 주님을 모르는 죄(?)로 비그리스도인이 대다수인 사회에서 “적어도 저는 오늘도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았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름 석 자면 언제나 신문에 실리는 오피니언 리더가 즐비한 천주교회에서 “적어도 저는 오늘도 거짓 증언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뻔뻔한 종교집단이겠지만, 그것이 우리 교회의 실상이다.

한국 선교 230주년이 지나도 여전히 주일학교 교리 눈높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어찌 고해성사 한 가지일까 싶다. 고해성사의 형태를 한 가지 양식으로 고집하고, 그마저도 ‘부득이한 경우’를 구차하게 덧붙이는 주교회의의 ‘유연성(?) 있는’ 결정에 한없는 좌절을 느낀다.

앞으로 6년 후

교계의 두 신문이 다시 6년 후 ‘커버스토리’ 주제를 ‘고해성사’로 해보시라. 통회하는 자에게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은 용서하시는데, 굳어진 형식을 지키지 않을 때 하느님의 이름으로는 교회가 용서를 하지 못하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때도 우리는 폭탄 돌려막기에서 한 발자국도 못나갈 것이니.
 

 
 

김유철 (스테파노)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한국작가회의 시인, 경남민예총 부회장. 저서 <그대였나요>, <그림자숨소리>,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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