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탐구생활 - 3]

지난해 가을이었다. 가을걷이가 막바지에 달해 들판이 휑하니 비어갈 무렵,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마을에 나타났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에 섬뜩한 푸른빛까지 감도는 게 그리 인상이 좋은 편이 못 되었다. 하지만 넉살이 어찌나 좋은지 슬그머니 다가와서 나에게 말을 붙였다.

“아따, 이 동네에 젊은 사람이 다 있네요. 살만 하요? 저는 저 끝집 아들내민디 서울에 살다가 10년 만에 왔어라. 오랜만에 왔드만 이 동네도 많이 달라졌네요.”

▲ 도굴꾼들 손에 넘어갈 뻔한 우리 마을 선돌. 곡선이 부드러워 여성성이 돋보인다. 그 옛날 우리 마을은 여신이 다스리는 마을이 아니었을까? ⓒ정청라
그러면서 사투리와 표준어가 묘하게 섞인 말씨로 옛날이야기를 하나둘 풀어놓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네 살 때 할머니 집에 맡겨진 이야기, 마을 초입에 있는 선돌을 도둑놈들이 훔쳐갔는데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아온 이야기, 냇가 옆 오래된 느티나무 가까이에서 한밤중에 도깨비불을 여러 번 봤다는 이야기……, 마을의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이에게서 듣는 옛날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머나먼 과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과 신비의 숲을 거니는 느낌이랄까?

특히나 소리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충격적일 정도로 놀라웠다.

“산중에 살면 애기들 아플 때 병원도 못 가고 어쩌요? 나 여그 살 때는 아프면 무조건 소리떡(소리실댁)을 불렀어요. 소리떡이 쌀 한 주먹 들고 와서 이마를 살살 문질러주면 열이 펄펄 끓다가도 금세 나았어라. 이 동네 아그들은 다 그렇게 컸지라.”
“소리떡이라면 앞 못 보시는 할머니 맞죠? 할머니께 그런 능력이 있었어요?”
“요새도 옛날처럼 병을 나수는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급한 일 있을 때 소리떡 한번 불러 봐요. 진짜 용해당께요.”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며칠 뒤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마을을 떠났고, 나는 소리실 할머니에게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하기로 했다.

“할머니, 옛날에 동네 아이들이 아프면 다 낫게 해주셨다면서요. 쌀로 이마를 문지르기만 하면 열이 내렸다는데 정말이에요?”
“엉? 뭔 소리여? 뭔 말인지 못 알아먹겄네.”

몇 번이나 다시 여쭈었지만 똑같은 대답이었다. 진짜로 내 말을 못 알아들으시는 건지, 아니면 못 알아듣는 척하시는 건지, 그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다. 언젠가 소리실 어르신은 언제 돌아가셨냐는 질문을 했을 때도 똑같이 반응하셨던 걸 보면 말하기 곤란할 때는 못 들은 척하시는 것 같았다. (소리실 할머니는 정식으로 결혼하신 적이 없다고 한다. 아이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 채 아이를 낳고 키우셨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눈치 없이 아픈 기억을 들추었으니……. -_-;;)

마을에 다른 할머니들께 여쭈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빙긋이 웃고 넘어갈 뿐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는 분이 없었다. 단 한 사람, 한평 아주머니만 빼고 말이다.

“진짜여. 우리 시엄니 아플 때도 소리떡을 불렀당께. 오믄 인자 쌀을 한 그릇 줘. 그럼 인자 뭐라고 얄라얄라 해가며 쌀을 막 뿌리고 이마에 문지르고 해.”
“그렇게 하면 정말 아픈 게 나았어요?”
“이. 참말로 나았당께. 고맙다고 소리떡 밥 묵여주고 그랬제. 이마에 문질렀던 쌀도 인자 가져가라고 주믄 소리떡이 갖고 가서 밥 해 묵고 그랬어.”

▲ 마을과 오랜 세월 함께 지내온 느티나무. 등이 굽어 할머니 나무처럼 느껴진다. ⓒ정청라

지금은 장애인 수급자로 달마다 엄청난(?) 수입이 있지만 옛날에는 밥 한 끼니 제대로 먹기도 어려운 형편이라 병 고쳐주고 밥 얻어먹고, 동냥젖 먹여주고 밥 얻어먹고, 그렇게 근근이 살아가셨던 게다. 엄마 젖이 안 나와서 굶어 죽게 생긴 아기를 소리실 할머니 젖으로 여럿 살렸다는 얘기는 자주 들었는데, 마치 무녀와도 같이 치유의 능력까지 가지고 계셨을 줄이야! 아홉 살에 열병을 앓아 앞을 못 보게 되셨다는데, 그러면서 어떤 신비한 힘을 지니게 되신 것일까? 고통의 바다를 건너본 사람만이 다른 이들을 고통에서 구원하는 능력을 얻는 법. 한 예로 시각장애인들이 지압이나 침술에 능한 경우도 많지 않은가.

“근데 요즘에는 아프면 다들 병원으로 가잖아요. 소리실 할머니도 보건소에서 주는 약 꼬박꼬박 챙겨 드시는 것 같던데. 언제부터 그랬어요?”
“몰러 나도. 교회 댕기면서부터 그랬나?”

그러고 보니 소리실 할머니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마을에 이사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에 빠지시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심지어 추운 겨울에도 수요 저녁 예배마저 빠지지 않으신다.

치유의 힘을 지닌 무녀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다니!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있을까? 그러면서 현대인, 그리고 종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 불순하기 그지없는 초자연적 힘은 사그라지고 잊힌 것일까? 힘을 가진 사람 스스로 기억과 능력을 덮어버릴 만큼? 그 힘에 의지했던 사람들도 모든 사실을 은폐하고 싶어 할 만큼?

갑자기 미국인들이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길들인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떤 초월적인 힘과 통하고 있어 영적으로 예민했던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달마다 연금을 주고 교회에 다니게 하면서 그들만의 탁월한 영성과 지혜가 사라졌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것은 비단 아메리카 원주민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나보다. 우리 마을 공동체 안에서 소리실 할머니 약손이 사라진 데도,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인 힘이 영향력을 잃게 된 데도, 그와 같은 교묘한 뒷작업이 있었던 게다.

아, 소리실 할머니의 약손을 다시 만날 수는 없을까? 나는 할머니 약손이 그립다.

소리실 할머니는
아홉 살에 눈이 먼 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다. 아빠도 모르는 아들 둘을 어렵사리 낳아 키우는가 하면, 아들을 낳아주는 조건으로 다른 마을에 씨받이로 살러 갔다가 결국 딸만 내리 둘 낳아 애들 넷을 데리고 쫓겨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눈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아이를 키우며 사셨을까 싶은데, 동냥젖을 물려가며 동네 아이들까지 키우셨다고 하니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만큼 한도 많고 슬픔도 많아 툭 하면 눈물바람을 하신다. 함께 밥을 먹거나 옆에서 지켜보면 다른 할머니들이 소리실 할머니를 눈에 안 보이게 살뜰히 챙겨주는 모습이 보인다.
 

정청라
귀농 7년차, 결혼 5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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