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39] 마태 26,14-27,66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오늘 미사에서는 수난 복음(마태오)을 듣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 과정에서 제자들이 보인 태도를 보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물었다. ‘내가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수석 사제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26,14-16)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26,33)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26,35)

“그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26,56)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였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26,70)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다시 부인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26,72)

“그때에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말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26,74)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고(26,75),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그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쳤습니다(27,3).

▲ <그리스도의 체포>, 대 루카스 크라나흐, 1538년
우리는 간단하게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을 ‘개인의 나약함’ 쯤으로 보려 합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나약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다른 요소 하나는 개인의 나약함과 유혹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고(26,35),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고 설명합니다(26,56).

성경의 이 두 구절은 제자들이 모두 ‘실패한 제자들’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도, 집단도, 사회도, 국가도, 그리고 교회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것 때문에 베드로나 유다처럼 슬피 울고 뉘우쳤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은 다음에 모두 한 자리에 모였을 것입니다. 비록 두려워했더라도 말입니다. 어쩌면 이는 단체도, 집단도, 사회도, 국가도, 그리고 교회도 실패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실패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음으로 공동체의 실패를 생각합니다. 성경의 이 두 구절이 없었다면, 그 두 제자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제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오늘날 성경을 읽고 있는 ‘나와 우리’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서 있을 것이라 믿고 싶어 할 것입니다. 베드로나 유다 같은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와 그분을 팔아넘긴 유다를 비난할 것입니다.

비난에 그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배반자를 처단하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배반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그 악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은 ‘선’의 편에 서 있음을 드러내려 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악’을 감추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타인’을 물리쳐야 할 ‘악마’로 만들면, 이중의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악마를 배척하고 척결하는 일을 정당화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악’을 감추고 ‘정의의 사도’로 보일 수 있는 효과가 그것입니다.

수석 사제들이 그렇게 집요하게 예수님을 ‘처단’하려 했던 것은, 바로 자신들의 ‘악’을 감추고 ‘정의의 사도’로 보이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힘을 빌리고 베엘제불하고 손을 잡았다고 몰아간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악마로 만들어야 그를 처단할 명분을 세우고, 그분을 처단하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 오히려 ‘악마’의 제거로서 마땅히 해야 할 ‘정의로운 행동’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이렇게 정당화합니다.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48-50)

‘거룩한 곳과 민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숭고한 뜻’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여러분에게 더 나은 것’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더 나은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자리에 모인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더 나은 것’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룩한 곳’이라 한 곳을 예수님께서는 ‘강도들의 소굴’이라 했습니다. 그들이 ‘민족’이라 한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두면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믿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왜 모두 예수님을 믿으려 했을까요? 적어도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하신 일’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하신 일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민족’과 ‘거룩한 곳’을 내세워 예수님의 제거라는 뜻을 이루었으니 성공한 셈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자신들의 실패를 포장하기 위한 것, 자기들에게만 더 좋은 것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짧은 근현대사에서 우리는 그런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 땅의 부일 지도자들이 그랬고, 해방 후 이 땅의 독재권력집단 역시 그랬습니다. 학습한 ‘수석 사제’와 ‘최고의회’와 ‘원로들’은 더 정교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그런 일을 계속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실패의 교훈입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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