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일본 핵발전소 폐기 천막농성 1080일, 아오야기 유키노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당연한 답이겠지만, 직접 느껴보기 전까지는 알기 어렵다. 마치 사랑을 경험해봐야 이것이 사랑인지, 그저 설렘에 그칠지 알게 되는 것처럼.

성령의 존재도 그렇다. 교리서에 쓰인 설명을 읽고 또 읽어보지만, 성령의 현존을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아는 것은 다르다. ‘성령’이라는 단어가 한 문장 걸러 한 번씩 등장하는 뜨거운 강론이 공감을 얻기 힘든 이유는 그래서일 거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고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런데 아오야기 유키노부 씨는 달랐다. 일본 후쿠오카에 위치한 규슈전력 본사 앞에서 핵발전소 폐기를 요구하며 1080일째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그는, 지치지 않는 활동의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성령이 나를 이끌어 주신다”고 말했다. 그의 대답은 잔잔한 강물처럼 흘렀다. 일부러 파도를 일으켜 자신을 꾸미지 않았다.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였다.

그는 어떻게 성령의 존재를, 심지어 성령의 이끄심을 삶 속에서 확신할 수 있었을까. 아오야기 씨는 최근 탈핵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취재를 핑계로 1박2일간 밀양과 고리를 방문하는 일정에 동행해 성령이 이끄는 그의 여정에 잠시 동참했다.

▲ 아오야기 씨가 규슈전력 앞 농성 천막을 방문한 가족에게서 선물받은 꽃을 들고 있다. (사진 제공 / 아오야기 유키노부)

농설 벌이며 ‘모세와 베드로의 천막’ 떠올려
“우리는 핵발전 제국에 대항해 인간 존엄을 지키고 있다”

규슈전력 본사 앞에 탈핵을 요구하는 천막이 세워진 건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하고 한 달 후인 2011년 4월 20일이었다. 규슈전력은 사가현과 가고시마현에서 겐카이 핵발전소와 센다이 핵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다. 수년간 이들 핵발전소의 노후화와 수차례 반복된 안일한 사고 대처에 문제를 제기해온 시민들은 이전보다 더 강력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시내 한가운데 세워진 천막은 곧이어 후쿠오카 탈핵운동의 거점이 됐다.

“경찰이 노숙을 금지하기 전까지 처음 한 달은 24시간 동안 천막을 세웠어요. 해가 지면 천막을 스크린 삼아 핵발전소 문제를 고발하는 영상을 상영했죠. 규슈전력 건물에 영상을 띄우기도 했어요. 천막이 매일 같은 장소에 세워지는 게 알려지자 탈핵을 지지하는 다양한 젊은이들이 찾아와 퍼포먼스, 패션, 음악, 춤을 도입해 이전까지 볼 수 없던 형태의 시위를 준비했죠.”

천막은 아오야기 씨의 사무실이기도 하다. ‘원전 안녕 후쿠오카 실행위원회’를 비롯해 피폭 노동자 소송 지원모임, 겐카이 핵발전소 폐기를 위한 1만인 소송운동 등의 실무를 맡고 있는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천막을 지킨다. 이른 아침, 규슈전력 본사 앞으로 출근해 밤사이 접어두었던 천막을 치는 것이 그의 첫 업무다. 그는 핵발전소라는 거대한 괴물에 맞선 작은 천막의 의미를 성경에서 찾았다.

“천막을 지키면서 모세와 베드로의 천막을 떠올렸어요. 모세는 파라오의 통치 하에서 고통 받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광야에 천막을 세웁니다. 그들에게 천막은 탈출 여정을 이어가는 잠자리가 되었고, 하느님을 만나는 ‘만남의 천막’이 되었죠. 또한 베드로는 예수의 변모를 목격하고 나서, 그 자리에 천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고 함께 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지배에서 탈출하고, 예수 시대의 사람들이 로마 제국의 지배에 맞선 것처럼, 우리가 핵발전 제국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천막에서 사람들은 핵발전에 대항해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있는 것이죠.”

아오야기 씨는 밀양으로 이동하는 동안 노트북을 꺼내 한국에서 받은 명함을 이메일 주소록에 정리하느라 애를 썼다. 새로 만난 이들에게 그가 매일 이메일로 발송하는 탈핵 뉴스레터를 보내기 위해서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명함 속의 작은 글씨를 읽고, 자판에 입력하는 일은 휴게소에 도착할 때까지 한참이 걸렸다. 이어 한국과 자신의 인연을 한참동안 이야기하다가 조용한가 싶더니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60대 후반의 나이를 지울 정도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사람이었다.

▲ 아오야기 씨가 매일 쓰는 중절모와 목에 두른 수건에는 탈핵 구호가 적혀 있다. 그 뒤로 고리 핵발전소가 보인다. ⓒ한수진 기자

“외아들이 대 잇게 해달라”는 부모님 청원에 단념한 수도생활
이주노동자 돕다 해고됐지만 당당한 ‘전업 활동가’

한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에 입회해 수도자의 길을 걷던 청년이었다. 혼자 찾아간 동네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수도회 입회를 청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이르다는 이유로 5년 동안 사회생활을 경험하고서야 입회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3년 뒤, 부모님이 수도원에 찾아와 하나뿐인 아들이 대를 이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는 바람에 수도생활을 중단하게 됐다. 간절히 원했던 길을 되돌아 나와야했던 청년 아오야기 씨에게는 아쉬운 일이었겠지만, 이 시간들은 그를 다른 곳에 쓰려는 하느님의 계획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오야기 씨는 천주교 재단 중학교에서 사회 과목 교사로 일하고, 본당 청소년사목 담당자로 활동하면서 부모님의 바람대로 결혼해 아이도 낳았다. 하느님의 특별한 계획이 드러나게 된 계기는 1975년 가와사키제철 공장 이전 문제였다. 공장에서 발생하는 매연과 가스로 주민 건강에 큰 피해가 발생하고, 이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가와사키제철은 문제가 되는 소결공장을 필리핀 민다나오섬으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피해소송운동에 참여했던 예수회의 야마다 게이조 신부가 아오야기 씨에게 이 문제를 상의해왔다. 두 사람은 민다나오섬을 방문해 공장 건설로 발생한 강제이주와 환경파괴 현장을 목격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실상을 알렸다.

“그때부터 매주 토요일 학교가 끝나면 작은 유인물과 현수막, 핸드마이크를 들고 번화가로 나갔어요. 현수막에는 ‘가와사키제철의 공해 수출을 저지하는 후쿠오카 시민모임’, 그 아래에 ‘일본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를 써 넣었죠. 그 이후로 많은 시민운동가들을 만났어요.”

그때부터 그는 “성령이 이끄는 대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들을 꾸준히 해나갔다. 가와사키제철 문제가 어느 정도 결론을 맺은 다음에는, 가수나 댄서가 되기 위해 일본에 왔다가 성매매를 강요받는 필리핀 여성들을 만나게 됐다. 필리핀과 맺은 인연은 마르코스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필리핀 민중운동과의 연대활동으로 이어졌다.

재일조선인 지문 날인 거부운동, 유학생 간첩단 사건 피해자 구명운동, 한국 민주화운동 양심수 구제활동 등 한국과 관련된 운동에도 참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에는 후쿠오카 시내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1993년에는 교회로 찾아온 페루인 이주노동자 지원활동을 벌이다 구속돼 4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준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1심에서 징역 3년을 받았던 아오야기 씨는 3년간의 재판 끝에 ‘일자리 알선 브로커의 행위와는 다르지만, 법을 어긴 것은 인정한다’는 판결로 벌금형 30만 엔을 선고받았다. 당시 일본 천주교회는 아오야기 씨의 구명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교사로서 학교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해고됐죠. 말이 안 되지만, 결국 해고 무효 소송에서 졌어요. 더 큰 문제는 학교가 퇴직금으로 1000만 엔을 주면서, 재판 기간 동안 지급한 월급 1680만 엔을 내놓으라고 한 거예요. 680만 엔을 갚지 않자 집을 압류했죠. 지금까지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마음에 분노가 솟았어요. 다행히 한 주교님의 중재로 반은 주교님이, 나머지 반은 학교가 내기로 되어서 집을 지킬 수 있었죠. 페루 이주노동자 사건부터 학교가 낸 민사소송까지 재판 기간만 12년이었어요. 하하하.”

아오야기 씨는 무용담처럼 집을 빼앗길 뻔한 이야기를 하고는 해맑게 웃었다. 그 일 이후 아오야기 씨는 짬을 내 활동하던 ‘시간제 활동가’에서 ‘전업 활동가’가 됐다. 그는 활동 분야에 선을 긋지 않았다.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 교회가 찾아가는 사람 모두와 연대했다.

▲ 밀양 평밭마을을 방문한 아오야기 유키노부 씨가 주민들이 송전탑 건설 부지에 판 구덩이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수진 기자

언젠가는 핵발전소 없는 세상이 온다

“옛날에는 성경을 읽으면 예쁜 말, 좋은 말만 가슴에 남았어요.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읽는 성경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말씀이었어요.”

아오야기 씨는 밀양 송전탑 반대 농성장에서 만난 주민들에게 하루 세끼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물으며 그들의 마음을 살뜰히 챙겼다. 국경을 넘어 같은 목표로 천막을 지키는 사람들이 느끼는 동지애였을 거다. 특히 그는 ‘송전탑을 막기 위해 목숨도 내놓았다’는 주민들의 말에 마음이 쓰이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인간은 언젠가 죽으니까, 어떻게 죽어도 매한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건 인간의 깨달음이에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기쁨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우리의 죽음은 부활의 기쁨이 되어야 해요.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죠. 수난을 지나고 죽음을 통과해야만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살아있는 한 이 세상에서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해요.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부활한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 때문이죠.”

그는 “핵발전소 없는 세상이 바로 눈앞에 와 있다”고 말했다. 현재 가동을 중단하고 있는 일본의 핵발전소들이 조만간 전력회사의 바람대로 재가동하게 될 거라고 전망하면서도, 그는 “언젠가는 없어진다”는 믿음을 굳게 갖고 있었다. 그 미래가 멀지 않은 것은, 그가 이야기하는 시간이 인간의 시간이 아닌 성령의 시간이기 때문일 거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