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평신도 교양 - 4]

들어가며

네 번째 글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민주 대 반민주’의 사고틀로 교회를 개혁할 수 있을까? 교회에 민주화 운동이 필요할까? 답부터 말하자면, 필자에겐 ‘복음 대 반복음’의 사고틀이 더 적절해 보인다. 스스로 깨닫는 복음적 방법을 모색해 보자.

세상을 따르는 교회의 시대

지금은 중세가 아니다. 교회가 세상을 선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한참 앞서간다. 종교는 문제의 해결방법이기는커녕 문제의 일부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지구상에 넘치는 인종 분쟁, 국경 분쟁, 테러 등에서 종교는 깊숙이 관여하고, 때때로 문제를 매우 악화시킨다.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세속을 참고하여 해결한다. 개신교나 천주교가 운영하는 단체에 스캔들이 생기면, ‘세상의 방식’대로 해결할 때 좋은 점수를 받는다. 대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요구가 앞선다. 곧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상세한 정보를 알려서 더 많은 참여를 촉구한다. 이런 방식은 회사나 정당이나 관공서의 방식을 교회가 참조한 것이다. 이런 방식을 거스르면 ‘반민주적 목사/신부’로 지탄받는다. 세상은 교회보다 투명하고 솔직하다.

돌아보면 우리의 체험 때문이다. 그동안 피땀 흘려 이룬 한국사회의 민주화란 대개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교회의 일부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느새 민주화는 우리 내면에 크게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교회쇄신을 두고도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교회에도 민주주의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틀렸다.

반민주와 반복음의 덩어리

한국교회의 중앙집권적이고 경직된 문화를 지적하는 소리는 여전히 높다. 성직자와 평신도 간 상명하복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점도 거듭 지적되었다. 한국 특유의 유교문화나 군사문화 때문에 ‘비민주적’ 풍토가 한국교회 안에 자리 잡았고 강화된다는 분석도 여전히 설득력 있다.

그런데 필자는 비민주적 문화와 동시에 교회 안에 세속적 성공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 더 눈에 띤다. ‘성공주의와 반복음과 반민주’가 밀접히 연관된 하나의 덩어리가 보인다. ‘반민주적 요소’는 문제의 한 측면일 뿐이다.

반체제 종교에서 세련된 종교로

본디 한국 가톨릭은 박해받는 종교였다.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은 천주교인이 될 수 없었다. 순교자는 믿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분들이었다. 조선 말엽부터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반도에서 천주교인, 서학쟁이는 공산당, 종북인사와 같은 말이었다. 그들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출세와 성공을 향해 뛰는 사람은 당연히 천주교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박해받는 종교는 성공적이고 세련된 종교가 되어 있다. 부자들이 더 좋아하는, 빛나는 종교로 어느새 ‘변모’했다. 안락한 삶을 위해 성직자와 수도자를 지원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필자는 지난 글에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역사를 잠시 돌아보았다. 1784년 이승훈 베드로의 북경 세례 이후 시작된 한국 가톨릭 교회는 2014년이면 정확히 231년째가 된다. 그러데 박해시대와 고난기를 거쳐 본격적인 성장기로 접어든 시기는 고작 61년 정도다. 이해를 위해 표를 다시 한 번 게재한다.

- 박해시대: 1784-1886년의 102년
- 고난기: 1953년 까지 67년 (구한말, 일제시대, 한국전쟁)
- 외형적 성장시대: 현재까지 61년

세속적 성공 문화는 폭발적 성장을 이룬 외형적 성장 시대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존재하는 군사문화, 양적 실적주의, 건설주의 등이 뿌리내린 시기도 사실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지금 교종과 일부 주교님과 신부님들이 ‘가난’에 대해 아무리 역설해도 꿈쩍 않는 평신도, 사제, 수도자의 의식은 이 때 형성된 것 같다. 최근에 입은 옷이지만, 우리 몸에 너무 밀착되어 있다.

이제 신자유주의에 맞서

지난 수십 년간 가톨릭교회는 공산주의에 맞서 싸웠다. 공산주의의 무신론적 철학도 큰 원인이고, 파티마의 성모님의 메시지도 영향을 주었을 테지만,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교회와의 마찰과 박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요한바오로2세는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제는 신자유주의의 차례인 것 같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비인간적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큰 문제로 인식하는 ‘거대담론’을 거듭하여 역설하였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의 투쟁은 공산주의와의 투쟁과 크게 다를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의 외부에 있었고 교회를 공공연히 반대했고 박해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교회의 일부처럼 보이는 착시가 널리 퍼져 있다. 신자유주의자 가운데는 열심한 신자도 많고, 현재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가치에 무척 친근하다. 교회 일부는 신자유주의에 아예 푹 절어있다. 이 점이 한국교회에도 뚜렷이 보인다.

‘반민주성’과 함께 ‘세속성’이 굳건히 결합되어 있다. 교회의 일부는 너무도 풍요와 물질주의에 익숙하기 때문에, 교종의 권고와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무시한다. 실질적인 ‘반교황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교회 안의 ‘반민주”가 아니라 ‘반복음’에 맞서야

교회의 반민주성이 지적될 때마다 필자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훼손되어서 문제라는 생각 보다는 복음이 손상되어서 문제라는 느낌을 더 받는다. 교회 내부 질서가 비민주적이라는 지적이 일어날 때에는 교회가 추구하는 과정과 목표가 복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지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높은 건물을 세우고, 세례 받는 신자 수의 목표치를 상향조정하거나 조기달성하기 위해서 다그치고, 세상에서 힘쓰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성직자들이 부유해지고 권력화 되고, 가난한 사람이 고위 성직자에 함부로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에서 일부 깨인 신자들이 교회의 비민주성을 제기하는 맥락을 고찰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반민주성이 아니라 반복음이다. 복음이 실종된 것이다. 교회는 민주적 절차로 작동하는 단체가 아니라 복음의 영감으로 사는 집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연극적 치유방법

교회에 민주주의적 절차를 도입하자는 주장에 필자는 머뭇거린다. 주교나 본당신부를 투표로 뽑자는 주장에도 갸우뚱하다. 교회 내에서 ‘민주화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이 좋겠다. 예수의 비유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지 않나. 그래서 일종의 연극적 치유방법을 도입했으면 좋겠다. 필자는 심리학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심리학적 치유 방법 중에 환자가 처한 상황을 스스로 연극이나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깨닫게 하는 방법이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 교회가 스스로의 반복음적인 행태를 돌아보는 연극이나 문학이나 그림을 만들면 어떨까.

비민주성과 굳건히 결합된 반복음적 행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돌아보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제 골프 문제에 대한 연극에 사제들이 스스로 출연하면 좋겠다. 골프나 비싼 스포츠에 스스로 돈을 지불하면서 참여하는 구체적 과정이 궁금하다. 사제 생활의 구체적인 부분까지 잘 묘사되면, 신자들의 호기심을 높일 것이다.

교종의 언어를 빌리면, 가톨릭교회의 “궁정문화”를 묘사해 보는 것도 의미있겠다. 우리 교회에서 투서는 도대체 얼마나 자주 심각하게 이루어지는가. 고위직에 있는 분들은 귀족의식을 갖고 있나. 그건 어떻게 드러나나. 교회의 의사결정은, 흔히 연속극에서 보이듯 암투와 시기와 질투와 속 좁음이 넘치던 조선조 규중문화와 닮지 않았나. 교종이 제기했던 출세주의 성직자를 묘사하는 문학작품도 필요할 것이다.

가톨릭계 대학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도 좋겠다. 박사학위만 있을 뿐 연구성과가 거의 없는 젊은 신부 교수와 그 옆에서 막대한 저서를 자랑하는 만년 평신도 강사의 허리 굽힌 백발은 어떠한가. 구체적이고 절제 있는 대비는 깊은 페이소스를 자아낼 것이다. 그 페이소스에 담긴 부끄러움과 자각과 영감이 교회가 건강히 일어날 수 있는 원천이 될 수 있겠다. 가톨릭계 사업장의 노동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의구현 사제단 주변의 평신도 일꾼들의 목소리도 묘사되었으면 좋겠다. 묘사는 구체적일수록 좋다. 모두가 용기를 내야 할 일이다.

얼마 전에 필자는 공지영 작가의 <높고 푸른 사다리>를 재밌게 읽었는데, 500만 신자 시대에 새로운 가톨릭 문학이 꽃필 수 있는 여지를 보았다. 다른 한 편으로는 교회의 세속적이고 반복음적 모습을 묘사하는 가톨릭 문학은 우리 가톨릭교회의 성숙함과 자기치유능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교회는 질적으로 성숙하고 우리는 더 복음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내 민주화 투쟁’을 주장하는 시각에서 보자면 이런 ‘묘사’의 주장은 협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이런 ‘묘사’에는 구호도 만장도 행진도 확성기도 필요 없다. 누구도 공격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시간을 낼 여유와 유쾌한 연극과 박수와 공감과 눈물과 유머와 페이소스가 있을 것이다. 예수의 경우처럼 내면의 깊은 울림이 우리를 구원한다. 사소하고 구체적인 것을 좋아하는 필자는 이런 구체적 묘사가 주는 객관화와 심리적 치유의 효과가 교회 쇄신에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가며 : 용기를 청해야

글을 맺으며, 한국교회의 200주년 사목회의를 돌아본다. 우리신학연구소의 <갈라진 시대의 기쁜 소식>에 연재되는 ‘부활하라! 200주년 사목회의’ 꼭지에는 대개 짙은 회한이 묻어난다. 잘 만들어 놓고 실천하지 않는 아까운 문서를 향한 것이리라. 하지만 ‘문서’를 향한 그리움은 접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30년 전의 문헌이라면 새롭게 손대야 할 것도 많을 것이다.

‘꺾였다’고 평가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무리 지적해도 변하지 않는다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 문헌은 자랑스럽다. 한국교회의 200주년 사목회의 문헌은 분명 세계 교회사의 흐름에 발맞춘 것이었고 훌륭했다. 우리 교회의 발전상을 제시한 지표이자, 이후 각 교구의 시노드에서도 보이듯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평신도뿐 아니라 사제와 주교까지 나서서, 30년이 지난 이 시점까지 그 문헌에 대한 성찰과 짙은 감정을 표현하는 현상 자체가 문헌의 무게감을 입증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사람을 모아서 거대한 문헌을 또 한 번 만들어야 할까? 시대의 흐름에 맞게 조금 가볍게 가도 되지 않을까? 그 문헌대로 하지 않아서 그동안 교회가 정체된 부분이 있나? 회한도 묘사에 포함될 수 있다. 우리 모두 연극 무대에 오르려면 용기를 청해야 할 것이다.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서,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학을 공부했다. ‘평신도 신학자’의 자리를 기쁘게 모색하는 두 아이의 아빠이다.

<기사 제휴 / 갈라진 시대의 기쁜소식>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