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의 떼제 일기 - 11]

이십대의 우크라이나 청년 둘이 찾아왔다. 지난 겨울 내내 키예프의 민주화 시위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더 자유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꿈꾸는,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젊은이들이었다.

알렉산더가 떼제에 도착했을 때는 심각한 모습이었다. 자신이 겪은 일과 나라의 상황 때문인 듯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다음날 아침, 성경 묵상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우크라이나에서 친구가 한 사람 왔다”고 젊은이들에게 알렸다. 모두들 뜨거운 박수로 환영했다. 열흘이 지나고 만난 그는 “20분에 한 번씩 우크라이나 이야기를 하고 있다”며 웃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보여주는 관심과 연대에서 힘을 얻은 모양이다. 그에게는 자부심과 함께 자기 나라에 대한 염려가 여전히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우크라이나 청년 리사가 왔다. 작은 몸집에 군복 차림의 여성이었다. 알렉산더는 “우리 우크라이나의 영웅”이라며 리사를 소개했다. 그에 대해서는 신문 보도와 다른 수사들을 통해 이미 들었던 터였다. 동부 우크라이나 출신의 엘리사베트(리사)는 작년 11월 30일 경찰이 평화적인 시위대를 폭력으로 진압했을 때 키예프 한복판 마이단(독립) 광장에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유혈사태를 목격한 리사는 그때부터 시위대와 함께 줄곧 현장을 지켰다.

매서운 겨울날 수천 명의 시위대가 광장을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거기에 취사대가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임시로 가설된 부엌에서는 150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교대로 식사를 준비했다. 리사는 이들을 지휘하며 석 달 동안 시위대를 먹여 살린 것이다. 이 대규모 취사반은 그의 이름을 따라 ‘리사’라고 불렸다. 프랑스 신문은 리사를 “우크라이나 혁명의 마리안느”라고 소개했다. 마리안느는 프랑스 혁명을 거쳐 탄생한 공화정의 상징이자 자유와 민주주의의 아이콘이다.

▲ 알렉산더와 리사가 떼제의 젊은이들을 만나 우크라이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진 제공 / Devika Usova)

토요일 오후, 떼제에 머무는 젊은이들이 리사와 알렉산더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알렉산더가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경찰이 기습적으로 들이닥쳐 폭력으로 시위대를 해산하려고 했어요. 그러자 키예프 시민 다수가 시내로 나오게 되었지요. 마이단 광장에 텐트를 세우고 시위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어요. 경찰이 해산을 종용해도 많은 수가 계속 남아있었어요. 그러다가 밤중에 수많은 경찰이 투입되어 시위대를 완전히 포위했어요. 마이단 광장에 갇혀 있던 시위대는 모두 휴대전화로 친구들에게 연락했고 새벽 1시에 키예프의 모든 교회의 종이 울렸어요. 나도 그 시간에 전화를 받고 달려 나갔어요. 새벽 4시가 되자 광장은 다시 시위대로 가득 찼습니다.”

리사가 말을 이었다.

“11월 30일, 경찰의 유혈진압이 있자, 그 다음날 마이단에 50만 명이 모였어요. 광장 주변에 의무실과 식당을 설치하고 약품과 음식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나는 광장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어요. 결국 식당에서 일하기로 결심했어요. 처음에는 빵을 만들고 채소를 자르는 일을 거들었어요.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우크라이나 전국에서 음식과 약품과 의복과 담요가 계속 도착했어요.

우리는 자유롭고 부패가 없고 장애인도 존중받는 사회를 원했어요. 처음부터 시위는 평화적이었답니다. 러시아 언론은 테러리스트, 파시스트라고 선전했지만, 제가 목격한 것은 전혀 달라요. 많은 수가 학생이었고 어떤 정당과도 연결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경찰의 폭력진압이 계속되자 시위대도 화염병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들 방식으로 무장했다. 몇 차례에 걸친 경찰의 진압과 정체 모를 사람들의 실탄 사격으로 시위대 가운데 100명이 넘는 사망자와 훨씬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알렉산더는 이 대목에서 울컥하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내가 겪은 것을 설명하려고 하면 온갖 영상이 떠올라요. 어떻게 그런 야만적인 일이 유럽연합 바로 옆에서 벌어질 수 있었는지. …… 상황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 친구 가운데 사진기자가 하나 있는데 3월 16일 크림 반도에서 실종되어 아직도 소식이 없어요.”

우크라이나 혁명의 영웅 ‘리사’

광장에 모인 시위대 가운데 일종의 의병, 민병대가 조직되었다. 그들은 시위 기간 동안 폭력을 충동질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무기를 압수하고 사진을 찍어 ‘선동가’라는 말과 함께 곳곳에 부착했다. 그들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질서를 유지했다.

러시아가 크림 반도에 진출하자 수많은 젊은이들이 간단한 훈련을 받고 우크라이나를 지키기 위해 국경지대로 속속 떠났다. 알렉산더는 그들이 음식도 의복도 없이 숲속에서 지내고 있다고 걱정한다. 리사는 몇 달 동안 시위대를 먹여 살린 경험을 토대로 이제는 그 민병대를 위한 보급 루트를 준비하고 있다. “프랑스와 유럽에서 보내는 지원물자가 제대로 도착하지 않고 있어서 그것도 확인할 겸 프랑스에 왔다”고 했다.

리사는 어릴 때 뇌질환을 앓아 두 팔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민주화 시위가 계속된 독립광장에서 그녀는 한 사람의 장애인이 아니라 수많은 동료 시민들의 친구가 되었다! 키예프 대학의 철학교수 콘스탄틴 시고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의 눈에 리사는 압제자에 대한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다. 그는 자유를 향해 행진하는 수십만 명의 평화로운 시위대의 깃발이다. 신체 장애인들이 어떻게 마이단 광장의 중심인물이 되었나? 그것은 사회적 · 법적 · 시민적 장애를 넘어서려고 애쓰는 모든 이들이 그들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 Devika Usova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젊은이의 만남
“우리는 러시아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떼제에는 러시아 자원봉사자들은 물론 러시아 방문자도 여럿 있었다. 알렉산더와 리사의 얘기를 들은 다음 러시아 청년 엘레나가 질문했다. “최근의 사태를 겪으면서, 정치인들이 아닌 보통 러시아 사람에 대한 감정은 어때요? 사실 우리도 러시아의 변화를 원하지만 그것을 이루어내기가 참 어려워요.”

알렉산더는 말했다. “러시아에는 내 친구들도 많이 있고 지금도 페이스북과 스카이프로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그런데 러시아의 집회나 시위에 관한 법이 그렇게 억압적인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 시민들이 제대로 저항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요. 러시아 사람들이 용기와 패기가 부족하니 우크라이나에서는 우리가 러시아를 도와줘야 한다고들 말해요.” 농담반 진담반의 대답에 모두들 웃었다.

“우리는 러시아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러시아가 더 많은 기도를 필요로 하는지도 몰라요. 우리만큼 언론의 자유가 없으니까요.”

이들의 싸움은 원수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자유와 당신들의 자유를 위하여”라는 구호로 이웃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용기 있는 시민들과도 연대하고 있다. 러시아는 적국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자 역사적으로 형제인 나라다. 동부 우크라이나의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말을 하고 러시아에 가족이 있다. 리사도 시베리아에서 태어나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자랐다.

우크라이나의 사람들은 함께 손잡고서 두려움을 이기고 부패한 독재자를 쫓아냈다. 이제 피 흘려 얻은 자유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남녀노소, 부자와 가난한 이들, 동부와 서부, 신자와 무신론자들이 하나 되고 있다. 지난주에 이 나라를 방문한 우리 수사들은 언론의 피상적 보도와 달리 우크라이나의 일치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서부 우크라이나 르비브의 가톨릭 대학에서는 동부 우크라이나 하키프 대학생들을 주말마다 초대하는 교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오는 부활절에는 원하는 학생은 누구든지 르비브에 와서 민박을 하면서 이해와 우정을 키우도록 할 예정이다. 이런 노력이 그들을 ‘하나의 나라와 국민’(Nation)으로 만들어간다.

증오와 폭력, 복수가 아니라 자유와 희망을 소중히 품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우크라이나. 리사는 그 작으면서도 강력한 희망과 용기의 상징이다.
 

 
 

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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