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38] 루카 10,29-37

성경에서 ‘길’은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예루살렘으로 향한 길을 걷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천상의 예루살렘을 향해, 지상의 역사를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지상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에 대해서 제자들(교회와 그리스도인)과 예수님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사실 넘버 원 빼고는 모두 넘버 쓰리이면서도, 제자들의 마음과 머릿속에는 넘버 원의 승진을 향한 욕망이 가득합니다. “인간적인 힘과 현세의 영광을 추구하는” 길을 가는 셈입니다(교회헌장 8항). 그렇지만 예수님의 마음과 머릿속에는 ‘죽음으로 이루리라’는 넘버 원 ‘아버지의 뜻’으로만 가득합니다. “가난과 박해”를 통해 철저한 “비움과 버림”(교회헌장 8항)을 완성하러 가는 길인 셈입니다.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 길은 겉으로는 한 길이지만, 속으로는 분명 두 길, 그것도 만날 수 없는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제자들이 걷는 길이 마치 영광을 향한 상행선이라면, 예수님이 걷는 길은 ‘수치스러운 죽음’을 향한 하행선이라고나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셨고, 실제 실천하셨습니다. 길에서 벌어진 일과 관련해서 우리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가르침이 있다면, 아마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가 아닐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이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버렸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무수한 사람이 지금 그런 지경에 놓여 있고, 또 무수한 사람이 그런 지경으로 내몰리기 일보직전입니다. ‘세 모녀’의 ‘사회적 타살’은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매년 수천만 명의 어린아이들이 실제로 굶어죽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가르침에서 두 개의 극단적 태도를 대조시킵니다. 사제와 레위는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 <여관에 도착한 착한 사마리아인>,구스타브 도레

물론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은 사제와 레위와 사마리아인이나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 익명의 ‘어떤 사람’도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초주검이 되어 길에 너부러져 있는 그 익명의 어떤 사람을 사제도, 레위도, 사마리아 사람도 보았다는 점 역시 공통점입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너무나 분명해서 그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멉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와 레위에 대해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고 너무나 간단하게 묘사합니다. 그렇지만 사마리아인의 태도와 행동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수학이나 물리 시간에 좌표를 그릴 때 중앙을 0으로 삼고 오른쪽 끝에 플러스 무한대를 왼쪽 끝에 마이너스 무한대를 기입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마치 그 좌표의 왼쪽 끝에는 사제와 레위가, 그리고 오른쪽 끝에는 사마리아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잇따라서 이 도식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에서 부자와 라자로 사이를 떠오르게 합니다. 지상의 삶에서건 죽은 다음에서건 말입니다.

사제와 레위가 그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면 그나마 할 얘기가 있을 것입니다. 몰랐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같은 길을 가고 있었고, 분명히 “그를 보았다”고 했으니 그 핑계도 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길 반대쪽”으로 건너갔느냐고 따지면, 어쩌면 사제로써, 혹은 레위로서 다른 급한 볼 일, 혹은 반드시 해야 할 다른 일이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사람은 지금 ‘두들겨 맞고, 옷을 빼앗기고,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데, 세상 어떤 일 가운데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시간, 하느님의 공간으로 모든 사람이 굳게 믿고 있던 ‘안식일’과 ‘성전’도 ‘사람을 살리는 일’을 위한 것이라 가르치신 것을 고려하면, 예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사제와 레위가 ‘다른 중요한 일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한다면 궁색할 뿐더러 뻔뻔하기까지 합니다.

그 사람의 상처에 부어줄 기름과 포도주를 갖고 있지도 못했고, 나귀도 없었고, 돈 한 푼 없어서, 해 줄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해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역시 이유가 되기 어렵습니다. 하다못해 그 사람을 업고서라도 그 사람을 도와줄 재물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데려가서 ‘이 사람 좀 도와주십시오. 저는 지금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서 그럽니다. 후에 제가 꼭 갚겠습니다’ 할 수는 없었느냐고 되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못하면 도와줄 사람을 찾아주는 일도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주었고, 가진 것을 내주었고, 후일까지 약속했습니다.

앞에서 이 비유가 우리, 곧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가르침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이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버렸다”고 했는데, 그 ‘어떤 사람’은 누굴까? 하는 물음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을 성찰하면, 그는 바로 또 다른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곤혹스럽습니다. 사제와 레위는 그 또 다른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 외면은 어쩌면 그 ‘어떤 사람’을 초주검으로 만들어놓은 ‘강도들’과 한 편이 되는 것이기도 하기에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교회의 자기보전’을 경계(?)하면서, ‘세상의 복음화’를 위한 길을 걸으라고 ‘권고’합니다(27항). 그리고 그것을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 더 나아가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주신 하느님의 사명(mission)이라고 강조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복음화의 사명을 수행해야만 하는 요원(agent, 요원은 자기가 할 일을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기관이 부여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입니다)이라고도 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고백한 교회의 본성과 사명에 비추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명은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혹은 거부해서도 안 되고, 소홀히 해서도 안 되는 그런 것입니다. 게다가 사소한 사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라는 막중한 사명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저’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쯤으로 들립니다. 우리는 ‘mission’을 ‘사명(맡겨진 임무)’이라고, 곧 하느님께서 충실히 수행하라고 맡긴 임무로 보지 않고, ‘선교(종교를 전하여 널리 펼침)’라고, 곧 교세의 확장쯤으로만 생각하는 데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이 ‘mission’은 ‘사명’이 아니라 ‘선교’입니다. 때로는 이를 합하여 ‘선교사명’ 쯤으로 환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인 오늘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물으십니다. ‘자기보전을 위해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릴 것인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너도 나가서 그렇게 할 것인가?’를 말입니다.

마침 곧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종 프란치스코가 당신의 사목지 가운데 한 곳, 한국 교회를 찾는다고 합니다. 스승 예수님처럼 ‘가난과 박해, 비움과 버림’의 길을 걷고 싶다고, 그렇게 같이 가자고 수도 없이 밝힌 교종을 한국 교회는 어떻게 맞이할지……. 보편교회의 사목자 당신이 <복음의 기쁨>에서 밝힌 사목임무를 제대로 수행했는지 못했는지 곧 드러날 것입니다.

사제와 레위가 사마리아인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부정의 고통부터 겪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사순 시기, 광야에서의 정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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