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의정부교구 시국미사 강론 전문

▲ 김현배 신부
찬미 예수님!

봄이 왔습니다. 움츠렸던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시절에 우리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죄 많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심을 감사하는 시기입니다.

지난 금요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님을 비롯해서 30여 명의 신부들이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습니다. 교황님도 같이요. 그런데 몬시뇰의 안내로 당신의 고해 자리로 가시던 교황님이 갑자기 이미 고해소에 들어가 있던 다른 신부 앞에 가시더니 무릎을 꿇고 먼저 3분간 고해성사를 보셨습니다. 교황님께는 보통 고해 사제가 있습니다. 고해성사가 끝난 후에 교황님은 신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렇지요. 그런 죄인인 나를 위해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베네딕토 교황님이 “거의 끝낸” 문서였지만 갑자기 사임하심에 따라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조금 더 다듬고 내용을 덧붙인” 회칙 <신앙의 빛> 16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사가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을 신앙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바로 이 순간에 하느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가 환히 드러났다.”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인 나를 위해서 주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신 그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신자들은 딱 두 가지 죄만 짓습니다. ‘주일 미사 빼먹은 죄’와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 이 죄 외에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고해소에 들어오셔서 “저 죄가 없는데요” 하십니다. 깜짝 놀랍니다. 천사가 내려왔나? 하지만 천사도 죄를 짓지요.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시고, 어둠의 사슬로 지옥에 가두시어 심판을 받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셨습니다”(2베드 2,4)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한국 신자들이 죄가 없다거나, 아니면 두 가지 죄밖에 없다고 하는가?

우리 신부들이 교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입니다. 물론 박해 시기와 외국 선교사들은 우리말이 잘 안 돼서 전교회장들이 교리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시복되는 정하상 바오로의 아버지요,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은 교리교사들의 모임인 명도회의 초대 회장이셨습니다.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짓기도 했습니다.

옛날에는 교리를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글을 몰라도 이 <천주교 요리문답>의 320조문을 다 외워야 했습니다. 그래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판공 때도 이 문답에 대한 찰고를 마쳐야, 그러니까 신부가 고해성사 전에 먼저 이 문답의 항목을 물으면 누구든 바로 그 답을 해야 고해성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찰고지를 미리 나눠주고 답을 써오면 시상을 한다고 해도 안 합니다. 물어보면 모른다고 하면서도 특강을 하거나 견진교리로 교육 일정을 잡아도 안 듣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앙 성숙에 주력을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2013년 천주교 의정부교구 신자들의 신앙의식과 신앙생활>에 보면 ‘우리 교구가 지금 시기에 가장 주력해야 할 분야’라는 질문에 30% 가량이 “신자들의 신앙성숙”이라고 답했습니다.

상계동에서 만난 할머니 한 분이 제게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원래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는데 시댁이 교우였답니다.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오시더니 쌀 한 말을 머리에 이어 주시면서 한 달간 어디를 좀 가자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를 따라나섰더니 성당의 여성 전도회장 댁에 데려다 주셨습니다. 거기서 전도회장과 한 달을 같이 숙식하면서 교리는 물론이고 미사와 기도뿐 아니라 초상집을 다니며 연도까지 다 배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요. 교리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신자 생활까지 배우신 것입니다.

▲ 2일 저녁 주교좌 의정부성당에서 천주교 의정부교구 사제연대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미사를 봉헌했다. ⓒ문양효숙 기자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유명인사를 데려와서는 이분이 굉장히 바쁘니까 간단하게 교리교육을 하고 세례를 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저는 당연히 “앙∼돼요!” 그렇게 바쁘신 분에게 세례를 준들 미사에 참여하겠습니까? 그리고 미사에 참여한들 그 미사의 내용을 알기나 하겠습니까?

교리교육은 미사를 알아듣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미사 안에 우리 신앙의 모든 내용을 담아 놓았습니다. 성사 중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알아듣지 못하는데 영성체를 한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는 유명인사인지 모르겠지만 성당에서는 모두가 다 하느님의 자녀일 뿐입니다. 의정부교구의 주교좌는 바로 저깁니다. 저렇게 주교님의 의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에는 영주의 자리도 성당 입구 쪽에 있습니다. 성당에서 영주의 자리는 교구장의 자리보다 낮습니다. 가르쳐야지요. 예비신자가 교리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은 바로 그 예비신자 기간 밖에 없습니다. 그 시기를 빼앗으면? “앙∼돼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신부들이 교리교육을 놓아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도 너무 짧습니다. 6개월이면 그래도 다행이고, 아니면 외짝 교우 교리라고 두 달 만에 끝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리교육의 과정뿐 아니라 기간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자라야 하고, 가톨릭의 교리가 그리 간단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2012년 10월 11일부터 2013년 11월 24일까지 ‘신앙의 해’를 지냈습니다. ‘신앙의 공의회’였다고 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과 함께 <가톨릭교회 교리서> 반포 20주년을 기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1992년에 교리서를 내시면서 교황령 ‘신앙의 유산’ 3항에서 “교리서는 새 것과 옛것을(마태 13,52)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 안에 살아 있는 성전의 가르침, 정통 교도권의 가르침, 교부들과 성녀들의 영적 유산으로 물려준 가르침들을 충실하게 체계적으로 제시”(2항)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도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이 시대의 언어로 재해석하고, 또 현대의 많은 요구들이 교리서에 담겼기에 교황님은 이 교리서를 “신앙의 교향곡”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 교리서에는 4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1편 신앙 고백과 2편 그리스도의 신비 기념, 3편 그리스도인의 삶, 4편 그리스도인의 기도. 이 네 기둥입니다. 그런데 이 기둥은 종교개혁 후 트리엔트 공의회 후에 나온 ‘로마 교리서’ 안에 이미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것을 세우신 분은 가롤로 보로메오 성인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까지 가르치는가? 2편까지만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신앙 고백과 신비인 전례와 일곱 성사, 기도문까지만 가르치고, 정작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3편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자녀로서의 삶을 배우지 못했기에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자업자득입니다.

▲ 시국미사가 열린 주교좌 의정부성당 앞 ⓒ문양효숙 기자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를 아무리 외친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를 기도 때마다 외운들, 성당 안에서만 이것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신자가 되는 것은 마음의 위안과 복을 받기 위한 것이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성당 안에만 있으라는 것 아닙니까?

아니지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당신의 첫 번째 회칙 <신앙의 빛> 51항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세상을 멀리하지 않으며, 현대인의 구체적인 관심사에 무관하지 않습니다. …… 신앙은 공동선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모든 이를 위한 선물, 곧 공동의 선물입니다. 신앙의 빛은 교회 내부만을 밝혀 주거나, 내세의 영원한 도성을 짓는 데만 기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으로써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게 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사건의 과거 기억만이 아닌 부활의 미래까지 기억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살고 있지만 다가올 미래를 그리워하며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현대인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모른 척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는데도 “이 세상의 고통을 잘 참아 견디면 죽어서 하느님의 나라, 천국에 가서 하느님께 위로를 받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는 이야기했었습니다. 결과는? 칼 마르크스는 그런 “종교는 아편”이라고 선언했고 신자들은 성당을 떠나갔습니다. 교회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효가 레오 13세 교황님의 노동헌장이라고도 불렸던 <새로운 사태>입니다. 그 이후 교회는 계속해서 이 세상에 대해 말했고, 그 결정판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복음의 기쁨>입니다. 교황님마저도 공산주의자라고요?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더 이상 천주교 신자가 아니지요. 여러분의 입맛에만 맞는 말을 들으시려면 여러분이 교회를 만들어서 여러분의 지도자를 초빙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더 이상 가톨릭교회가 아닙니다. 저는, 여기 모인 모든 신부들은, 가톨릭의 신부들입니다. 우리는 기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사는 교사들입니다.

이번에 교황님이 오셔서 시복하는 황일광 시몬은 백정이었는데 세례를 받고 나서 이렇게 말하곤 했답니다. “내게는 이 세상에 하나, 또 후세에 하나, 이렇게 천당이 두 개가 있다.” 천주교는 조선 정부가 금한 종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부의 명이 아닌 신앙을 따라 죽음도 불사합니다. “만 번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겠으니, 저를 마음대로 해 주십시오.”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권>, 474쪽)

여러분의 천국은 어디입니까?


김현배 신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의정부교구 2지구장 겸 지금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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