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빛의 눈길 - 이찬수]

4월부터 성서와 신학을 바탕으로 세상을 돌아보는 이찬수 교수의 칼럼 ‘먼 빛의 눈길’을 4주 간격으로 싣습니다. ―편집자

한국은 ‘서울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울 중심적이다. 집값도, 수입 규모도, 대학 경쟁력도 서울이거나 서울에 가까울수록 비싸거나 많거나 높다. (물론 이때의 ‘서울’은 특정 지역을 의미하기도 하고 ‘대도시’의 상징으로 쓴 말이기도 하다.) 서울 중에서도 중심부에 사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사실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내 자신도 십 수 년 전 퇴촌(경기도 광주)으로 이사 간 뒤에야 조간신문조차 정오나 되어 집배원이 배달해주는 것을 보고서 신문은 으레 새벽에 배달되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얼마나 서울 중심적인 것이었는지 절감했던 적이 있다. 시골은 거저 살라고 하면 잠시 살아줄 수 있을 동네, 땅값도 당연히 헐값일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예루살렘 중심의 사유체계나 생활방식은 이천년 전 이스라엘에서는 이에 비할 바 없이 더했다. 하느님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서 거리가 멀수록 사람 살 곳이 못 되었다. 예수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자렛은 구약성경이나 랍비들의 문헌에 단 한 차례도 나온 적이 없을 정도로 보잘 것 없는 관심 밖의 동네였다. 이런 곳에서 그럴듯한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그 나자렛 출신이었던 것이다.

▲ 갈릴래아의 숲. 군데군데 올리브 나무가 많이 보인다. ⓒ한상봉 기자

▲ 나자렛. 이름없는 마을이었던 나자렛이 지금은 대도시로 변했다. 가운데 높은 첨탑이 있는 건물이 성모영보성당이다. ⓒ한상봉 기자

나타나엘이 나자렛 사람 예수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메시아라는 소리를 필립보에게서 듣고는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냐”(요한 1,46)며 비아냥댔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루살렘과 그렇게 거리가 먼 동네에서 무슨 좋은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당시 사람들의 예루살렘 중심적 관념상으로는 지당한 말이었다.

나타나엘은 율법을 공부하던 사람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나타나엘더러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던 데서 드러난다(48).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당시 율법학자들이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율법을 공부한 데서 연유한 랍비들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당시 율법가들은 하느님이 있는 도시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진리의 정도를 판단했으니, 나자렛에서 뭔가 신통한 것이 나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예수가 나타나엘에게 “이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47)고 말한 것도 이러한 정황을 반영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골 출신 예수가 도리어 “하느님의 아들”로 높여졌으니, 별 존재감이 없던 나자렛이 인류를 바꾼 역사적 장소가 된 것이다. 나자렛이라는 시골은 후세에게 종교 공부, 인생 공부를 하더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준다.

▲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는 늘 기도하는 유다교들과 순례객으로 북적인다. ⓒ한상봉 기자

예수가 당시 하느님이 있던 대도시 예루살렘에 갔던 것은 겨우 한두 번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날 예수를 받든다는 이들은 주로 대도시에 산다. 시골은 살기에 불편하고 자신의 사회적 가치도 떨어뜨리는 곳이다. 대형 종교시설도 당연히 서울에 있다. 예나 이제나 하느님을 경배하러 몰리는 곳은 대도시인 것이다.

종교인은 많지만 종교가 위기에 처한 오늘의 상황도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예수가 대도시로 간 것은 죽기 직전에 필생의 개혁 카드를 꺼내들고서였다. 지역적 중심을 신적 중심으로 삼는 종교적 관례에 도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하느님은 대중이 열망하는 곳보다는 대중이 외면하는 곳에서 스스로를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을 예수의 삶이 잘 보여준다. 만일 그런 예수의 삶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 시대 종교인은 기존 문명의 위계에, 권력이라는 중심에 평화적인 도전을 하고, 중심이라는 고정관념을 극복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이 최상의 선[上善若水]이라는 노자(老子)의 메시지는 예수의 삶과 통한다. 모두 중심으로 향하고자 할 때 스스로 주변으로 가는 이, 일부러 주변에 살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만드는 이, 그렇게 해서 결국은 모든 곳을 중심으로 만드는 이가 현대적인 의미의 신앙인,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는 서울에서 멀리 살았다’는 사실은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가 어디여야 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예루살렘처럼 화려한 성전이 없던 주변 지역에서도 ‘뭔가 신통한 것’이 나온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 당장 나오지는 않고 후세에 나온다. 그 시간적 거리에 굴복하지 않고서 양심의 빛에 따라 주변부를 선택하는 일이 예수에 가깝다. 이 시대의 종교개혁은 중심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주변을 선택하는 이들에게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찬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강남대 교수를 지냈으며, <종교로 세계 읽기>, <믿는다는 것>,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인간은 신의 암호>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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