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SBS 주말극,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우리나라 드라마 속에서 여자가 결혼을 결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처음엔 스스로와 상대방에 대한 무지 혹은 만용, 두 번째는 ‘이번엔 다를 거야’라는 착각, 그리고 세 번째는? 세 번째까지 가려면 또 무엇이 필요한가? 다 부서지고 망가진 이후에도 남은 게 있다면 말이다.

▲ SBS 드라마 <세번 결혼하는 여자>
SBS 주말극 <세 번 결혼하는 여자>(극본 김수현, 연출 손정현)를 보고 있으면 드는 생각이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해도 너무했다. 아니 (시청률이 잣대인) 드라마이기 때문에 유독 그런 걸까? 여주인공은 비슷한 불행의 고리를 계속 맴돌기만 한다. 점점 더 불행해지는 나선 계단에 갇혀 있다고 할까. 주인공 은수(이지아 분)는 ‘진짜 사랑’을 꿈꾸며 두 번의 결혼을 강행했지만, 현재 두 번째 남편의 아이를 임신 중임에도 이혼했다.

첫 번째 남편 정태원(송창의 분)과는 시댁의 구박에 못 이겨 딸을 데리고 도망치다시피 나왔고, 두 번째는 남편의 외도가 이유였다. 자신을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사귄 톱스타 출신이라니! 극중 ‘재벌가 아들다운’ 두 번째 남편의 쇼킹한 염문 앞에서도, 귀 막고 눈 막고 남편의 말을 믿는다. 심지어 그들 대가족이 바라는 대로 ‘아이’까지 만들고 난 후에야 은수는 깨닫는다. 어쨌든 남편 준구(하석진 분)와 여배우 다미(장희진 분)의 관계는 ‘진짜 사랑’임을. 그들 연인 사이에 자신이 오갈 데 없이 끼여 있었음을.

횟수만 늘린 결혼 조롱극인가

진정한 사랑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가진 여자는, 이렇게 또 다시 ‘사랑’에 속는다. 그런데 의아하다. 시청자는 극이 딱 시작되는 첫 회부터 이 결혼이 불안하다는 조짐을 느꼈다. 여주인공이 아무리 행복한 척 해도, 저런 얽히고설킨 상황을 그대로 놓아둔 채 행복해지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청자들은 이미 안다. 오직 오은수와 그 주변 식구들만 몰랐을 뿐이다. 아니면 ‘또 다시’ 재벌가 며느리가 될 환상에 부풀었던 것일까. 김준구의 식구들은 아들의 묘한 낌새를 알면서도 모른 척, ‘얌전한 며느리’를 얻으려 했던 것일까.

그런데 은수 자체는 얌전한 사람인지 모르나, 김수현 작가의 작품 속 세계나 한국 사회의 편견에 비추어, 초등학생 딸을 둔 이혼녀 오은수가 ‘얌전한’ 며느리 축에 속할 수 있는 건지도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이래저래 시청자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은수의 미래가 걱정스러웠다. 곧 울며불며 더 고통스러운 질곡에 빠지게 될 것을 예상했다고나 할까. 김수현 작가도 짐짓 모른 체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결혼으로 인해 어디까지 불행해질 수 있는지의 끝을 보여주려던 심산이었을까. 정말 의아했던 건 은수의 터무니없는 ‘순진성’이었다. 내면이 텅 빈 사람에 가까웠던 은수는 실은 자신의 딸보다 더 의존적이고 미성숙했다. 어린 딸을 친정에 두고 오라는 재혼조건을 수락할 때부터 이상했다.

한 마디로 여기 나오는 젊은이들은 201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김수현 작가도 2편 시나리오를 쓴 바 있는 1960년대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식의 불행한 관계를, 엄마와 아이를 생이별시키고 아버지는 방관자로 머무는 시대착오적 스토리를 초현대식 배경에서 재현하고 있다. 모든 권력과 결정은 ‘시댁’에서 내린다. 그래서 젊은 배역들은 마치 체스 말판처럼 움직이는 꼭두각시들 같다. 아마 그들 스스로도 대본 내용이 소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연기는 중견 배우들에게나 가능했다. 가부장제의 환상을 끄트머리라도 잡고 연기할 경륜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중견배우들의 그 대단한 혼신의 연기는, 실은 그들이 좀 더 젊을 때 했던 말하자면 80년대적 분위기의 재현이었다. 자신들이 젊었을 때 ‘을’로서 당하던 상황을 되갚는 방식으로서의 연기였다고나 할까.

▲ SBS 드라마 <세번 결혼하는 여자>


관점은 60년대, 배경은 2014년

아이는 낳아서 시댁에 보내고, 생부는 다른 여자와 결혼해 살고, 원래도 가난한 집 딸이던 생모는 생활고 때문에 쉬지 않고 벌어야 한다. 각각 다른 남자의 아이를 두 번씩이나 법적 배우자 신분으로 낳았음에도 아무런 보상조차 없다. 할머니나 아버지가 아무리 부자여도, 아내였던 여자는 가난하고 그런 엄마를 택한 아이도 역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태원이 우유부단하고 준구가 나쁜 놈이라는 식의 이야기조차 무의미하다. 악독한 시댁이 원인이라는 것도 식상하다. 은수가 비련의 여인이라는 말 또한 어울리지 않는다. 은수는 태원 에게는 딸을, 준구에게는 아들을 낳아주었다. 맡은 임무를 수행하듯 그렇게 낳아만 주고 ‘보내’ 버렸다. 글쎄, 요즘 그런 경우가 있을 수나 있을까? 최종회 방영 이후 ‘대리모’였냐는 시청자의 질타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들은 애초부터 결혼이라는 어떤 설정 속에 들어가 작가의 관념을 대신한 말판들에 불과했다. 아무리 울어도 아무리 비극적 상황을 늘어놓아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너무 동떨어져 그냥 ‘극’으로만 보인다.

오랜만에 드라마에서 보게 된 왕년의 스타 허진이 맡은 ‘임실댁’과 아주 특이한 악녀 채린(손여은 분)의 맹활약만이 막판에 이 드라마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는 관전평도 있었다. 아이에게는 생부라는 ‘명분’만이 중요할 뿐, 양육비와 집이 필요하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그런 ‘현실적’ ‘법적’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어쩌면 말 그대로 드라마 월드였는지도 모른다. 모든 걸 잊고 연기와 대사발만 즐기라는 것이었을까. 심지어 ‘세 번째’ 결혼은 자기 자신과 했다면서 손가락에 결혼반지 세 개를 끼고 사는 여주인공 모습이 40회의 대미를 장식했다. 드라마를 작동시키는 그 모든 요인이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만 어울리는 것들이다. 어쩌면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해 본 적 없는 강고하고 완벽한 가부장제의 세계다.

부부가 헤어질 수도 있지만, 아이가 미성년일 땐 엄마 품에서 크게 하고, 아버지를 주기적으로 만나고, 양육자에게는 양육비와 양육 환경을 제공하라는 당대의 사회적 합의조차 무시하는 ‘결혼 드라마’가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왜 그런 현실의 보편적 절차도 무시한 채 눈물과 비극의 대서사시를 끊임없이 이어가려 하는가. 정말, 그래야 시청률이 유지되는 것인가.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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