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적에 ⑨- 열한 살 때 (1950년)

 

편지를 읽고 있는 인민군 병사(자료사진)

 

허위허위 드디어 영주 집에 도착했어. 귀향이라고 했지만, 귀향은 무슨 귀향이겠어! 어디를 가도 불안하고 암담한 시절이었으니까! 그래도 길거리보다는 우리집이 낫고, 냇가 돌밭보다는 우리방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던지......

귀향(!)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집에 남겨두고 갔던 반 가마 정도의 쌀가마니를 찾는 일이었지. 하지만 쌀가마니는 보이지 않았어.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쉬셨고, 우리도 기운이 쭉 빠져 방바닥에 드러누웠지. 어떻게 한다? 

역시 우리집 가장이신 할머니께서 민첩하게 길을 찾아 나선 거야. 살아남기 위해서! 할머니는 나를 앞세우고 마을 안쪽에 진을 치고 있던 인민군 막사를 찾아갔지. 그 막사는 우리집에서 400미터쯤 되었을 거야. 우리 마을에 진을 치고 있던 인민군은, 영주-봉화간 철길이 지나가는 제방 밑 기와집에 거처하면서, 그 집 바로 앞 제방 밑에 방공호를 파놓았더군. 쌕쌕이가 나타나면 부리나케 그 방공호로 달려가던 인민군들을 그 후 몇 차례 봤지.

우리가 만난 인민군 장교는 얼굴도 잘 생긴데다, 어깨에 붉은 줄과 별인가가 있는 국방색 비슷한 윗도리와, 양쪽에 세로다지로 폭 2센티 정도의 붉은 띠를 댄 검정 바지를 입었고, 멋진 검은 가죽장화를 신고 있었는데, 멋져 보였어. 나중 생각이지만, 전투 군인이 아니고 통신이나 정훈 군인 같았어. 뜻밖에도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주더군, 그 전쟁통에! 할머니의 사연을 들은 그 인민군 장교는,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어딜 갔다가 금방 나타나서, 우리를 데리고 그 집 구석방으로 갔어.

그 장교는 쌀가마니 하나를 가리키면서 우리더러 확인해 보라는 거야. 쌀가마니에는 무슨 꼬리표가 달려 있는데, 할머니는 그 쌀가마니를 보시자마자 우리 거라고 하셨어. 그 꼬리표에는 아버지나 어머니 이름이 적혀있었는지, 우리집 주소가 적혀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아. 그 장교는, 할머니와 아이인 내가 들고 가기에는 무거울 테니 누굴 시켜 가져다드리겠다고 하고, 우리 보고 먼저 집에 가시라고 하더군.

고맙다고 인사하고 집에 돌아오기가 바쁘게, 인민군 하나가 그 쌀가마니를 지고 우리집에 온 거야.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를 보낸 후, 그 쌀가마니를 열어보니 피난 갈 때 남겨두고 간 쌀 그대로였어. 할머니는 ‘단 한 줌도 축난 게 없다’고 하시며 고마워하셨어. 그러나 더운 날씨 때문인지, 쌀에 하얀 곰팡이가 슬긴 했지만, 먹을 게 전혀 없던 때였으니 얼마나 고마웠겠어! 하얀 곰팡이가 슨 쌀을 햇볕에 말려서, 아껴아껴 먹으며, 한참동안 양식걱정 없이(!) 살 수 있었지.

인민군들도 먹을 게 부족했을 텐데, 양식을 그것도 하얀 입쌀을 먹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가 돌려주었다니, 이해하기 어려워요!

글쎄다! 인민군 치하에서 내가 겪은 두 달 남짓, 그리고 그 후 소문에서도 인민군이 여자를 겁탈했다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 세계전쟁사에 유례가 없다고 하더군. 해방부터 6ㆍ25까지, 길어야 기껏 5년인데, 그동안 어떤 정신교육을 했길래 그랬던 걸까! 아마도 금방 해방전쟁이 끝날 테니 그때까지만 참자고 했을까? 어쩌면 전쟁이 더 길게 계속 되었더라면, 인간의 어두운 본색(!)이 드러났을른지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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