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탐구생활 - 2]

모처럼 한 줄기 바람에서도 따사로움이 전해지던 봄날, 나는 다울이, 다랑이와 함께 들마루에 앉아 햇빛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앞집 한평 아주머니가 들이닥쳐 다짜고짜 소리치며 말씀하셨다.

“어여 가자고! 애들 데리고 산에 가서 머굿대 한 주먹 뜯어 오자고!”
“머굿대라면 머위요? 머위가 벌써 올라왔을까요?”
“몰러 나도. 산보 삼아 한번 가보자고!”

아주머니는 제안이 아니라 거의 명령하듯이 말하며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평소 같으면 강한 반발감이 들만도 한데 날씨가 좋아서인지 나도 기분 좋게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그럼 가볼까요?”
“우아, 신난다. 나도 갈래.”

다울이도 재빨리 신발을 신고 따라나섰다. 뭐가 그리 급한지 한평 아주머니는 다울이 손을 잡고 먼저 출발하시고, 나도 작은 칼이랑 나물 가방 하나를 챙겨들고 다랑이를 들쳐 업은 채 서둘러 뒤를 쫓았다.

“아따, 같이 가요. 뭐가 그리 바쁘실까.”
“놈이 끊어가기 전에 얼른 가야제. 수봉댁이 다 끊어 가븐단 말이여.”

그렇다. 나물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면 그 첫물을 맛보는 시점에 할머니들 사이에 눈에 안 보이는 경쟁이 시작된다. 어떤 나물이든 그 첫물이 가장 맛있기 때문이다. 제철 중에서도 그 첫 머리가 맛의 정수인 것이다. 특히나 입이 짧은 한평 아주머니는 한두 번 뜯어 먹은 나물은 “인제 안 맛나!” 하며 쳐다보지도 않으신다.

때문에 마음이 바쁘기만 한 한평 아주머니와 달리 다울이와 나는 걸음이 한없이 뒤처졌다. 봄이라서 여기저기에 볼 게 오죽 많아야지 말이다. 논이나 웅덩이마다 푸지게 싼 똥 마냥 담겨진 개구리 알주머니, 보랏빛 별처럼 빛나는 제비꽃들, 무서운 속도로 땅을 점령해가고 있는 초록 새싹들……. 여기를 보나 저기를 보나 아름다운 봄날! 봄기운을 만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뿌드드했던 몸이 점차 가벼워지고 있었다.

▲ 머위 첫물. 여린 초록은 할머니의 마음까지 뒤흔든다. ⓒ정청라

“아따, 언능 와. 다울아, 언능 와.”

아주머니의 채근에 다울이와 나도 부지런히 걸어 아주머니를 따라잡았다.

“이 골짝 머굿대가 젤로 빨리 나. 더 있으면 이짝 비탈로는 취도 올라올 거여.”

아주머니는 산에 올라가며 쉼 없이 눈을 번뜩이면서 말씀하셨다. 마을 일대 골짝마다 어떤 나물, 어떤 나무, 어떤 버섯이 나는지 훤히 꿰뚫고 계시는지라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말씀을 들었다.

“글고 저 산 하나만 넘어가면 거가 깨침 밭이여. 두릅나무도 얼매나 많다고. 근디 봉내 사람들이 와서 다 끊어 가븐께 부지런해야 써.”

그러고 보니 우리가 오르는 산 맞은편은 보성 복내 쪽이었다. 군 단위가 다르니까 굉장히 멀리 있는 마을 같지만 나물 철이 되면 산 하나를 두고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도 경쟁이 있는 것이다. 먹을 게 지금보다 귀하던 시절에는 전쟁을 방불케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른바 나물대전! 그렇다면 나물 하러 다니는 할머니들은 나물 전사? 그렇다. 나물죽으로 목숨을 연명해야 했던 때에는 할머니 칼끝 하나에 식구들 목숨이 왔다갔다했을 테니 전사라 해도 무방하리라.

아무튼 아주머니 말씀을 들으며 부지런히 걷다 보니 어느덧 머위 밭이었다. 그런데 머위가 신통치 않다. 아직 다랑이 손바닥보다도 작은 크기라, 뜯어 먹기 미안할 정도였다.

“아따, 너무 째깐타. 후제 뜯으러 와야 쓰겄네. 미안해서 어쩌까.”
“괜찮아요. 쑥이나 뜯죠 뭐. 저녁에 쑥국 끓여 먹으면 되겠다.”

아주머니도 나도 안타까웠지만 타이밍이 안 맞은 걸 어쩌랴. 우리는 머위를 입가심할 정도로만 뜯고, 지천으로 깔린 쑥을 뜯기로 했다. 다랑이를 업은 채 쑥을 뜯기가 힘들어 다랑이는 들에다 풀어 놓았다.

그랬더니 이 풀 저 풀 뜯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다울이는 다울이대로 머위 뜯다 쑥 뜯다 제법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엄마, 오늘 저녁에 쑥국 먹을 거야? 와, 신난다. 나 쑥국 좋아하는데.”
“너 쑥국 좋아한다면서 쑥국 끓이면 왜 쑥은 안 먹고 국물만 먹냐?”
“쑥이 너무 질겨서 그렇지.”
“그런데도 좋아하는 거야?”
“응. 나 쑥 많이 뜯어서 쑥떡도 해먹고, 쑥부침개도 해먹을래.”
“그래, 그럼. 쑥 많이 먹으면 쑥처럼 쑥쑥 자랄 거야. 쑥이 쑥인 게 쑥쑥 자란다고 쑥이래.”

나와 다울이가 한참 동안 쑥덕거리며 쑥 얘기를 하고 있었더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쑥을 뜯던 한평 아주머니도 한 말씀 하셨다.

“다울아, 쑥국 먹으면 ‘쑤꾹! 쑤꾹!’ 한다. 해봐. 쑤꾹! 쑤꾹!”
“쑤꾹! 쑤꾹!”
“워따 잘 한다. 쑤꾹! 쑤꾹!”
“쑤꾹! 쑤국!”

다울이도 한평 아주머니도 한동안 그렇게 쑥을 뜯으며 쑤꾹새가 되었다. 할머니 쑤꾹새와 꼬마 쑤꾹새 울음소리가 골짜기 가득 울려 퍼졌다.

한평 아주머니는
우리 마을에서 가장 젊은 축에 드는 할머니다. 본인이 자기 나이를 모른다 하시니 60대 초반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어릴 때 병을 앓아 지능이 살짝 모자라고, 발음이 어눌하시기는 하나 살아가는 능력은 탁월하다. 된장도 잘 담그시지, 고두밥 쪄서 술도 잘 하시지, 이 글에서처럼 나물에 대한 해박한 정보까지! 까막눈이라 우편물도 확인을 못하고, 버스도 혼자 못 타시지만 그런들 어떠하리오. 타고난 사교성과 쾌활함으로 삶을 나누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으시다. 나물 정보를 기꺼이 나누어 주시는가 하면 맛있는 게 있으면 무조건 나눠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나눔의 달인!
 

정청라
귀농 7년차, 결혼 5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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