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 한재훈, 갈라파고스, 2014
21세기 훈장이 전해주는 서당공부의 생생한 풍경

글 읽는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중 하나이며, 자신과 세상을 알아가는 소리이며,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가는 소리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서당의 이미지는 글 소리로 어우러져 다분히 청각적이다. 거기에 김홍도의 <서당도>와 스승의 회초리 등 몇 가지 시각적 이미지가 가미된다. 하지만 서당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공부했는지,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는 모른다. 서당교육은 이제 보편적이지 않고 한물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 한재훈, 갈라파고스, 2014
여기 박물관에서나 접할 수 있을 듯한 서당의 모든 것을 생생하게 불러오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 책 <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의 저자 한재훈이다. 이제 40대 초반의 그는 초등학교 입학통지서를 받고 제도교육을 뒤로하고 서당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저자의 아버지가 “교육은 한 사람을 ‘된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이에 적합한 곳이 서당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철학 때문에 저자의 형제들은 모두 서당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저자는 자식들을 다 서당에 보내 공부시키는 것을 주위에서 만류했다는 점을 고백한다.

하지만 서당을 하나의 소중한 운명으로 여긴 한재훈은 스스로를 “전통서당의 마지막 은혜를 입은 한 사람의 후예”라고 한다. 이에 서당에서 직접 공부하고 경험한 것을 소중하게 남길 책무로 이 책을 썼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책은 사라져가는 옛 교육에 대한 보고서의 성격을 갖지만, 그저 사실을 기술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안에서 현재에도 되살리고 길어 낼 참공부의 길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서당 공부의 백미는 무엇보다 글 읽기, 암송에 있다. 서당의 하루는 글을 암송하면서 시작하는데, 학도들은 매일매일 새로운 글을 배워서 백 번 정도 읽고 외우게 된다. ‘독서백편의자현’은 글을 지속적으로 반복해 읽고 암송함으로써 글의 섬세한 결을 느끼고 글이 담은 깊은 뜻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를 “문리가 났다” “문리가 트였다” “문안이 뜨였다”고 표현한다. 글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이 마음에 남아 각자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쳐야 한다. 이처럼 배운 바를 완벽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익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서당의 학동들을 고심하게 만드는 건 무엇보다 한시 짓기다. 오언과 칠언의 절구와 율시로 쓰는 한시는 운자와 성조를 고려해 써야 하기에 여간 힘들지 않다. 운자와 성조가 맞지 않아 기껏 구상했던 시를 포기하고 새로 구상해야 한다. 이처럼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운율이 있는 시적 표현으로 담아내는 시 짓기는 학문의 기본기를 다지는 과정이다. 스승은 제자의 시를 보고 잘된 부분에는 ‘관주’를, 고쳐야 할 부분에는 ‘작대기’를 표시하면서 제자와 학문적 교감을 나눈다. 서당의 풍성하고 다채로운 교육은 인간과 자연을 이해하는 전인적 인간을 양성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오래된 공부를 통해 배움의 참 의미를 묻는다

저자는 15년 동안 서당교육을 받다가 현대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 입시를 치르고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가 졸업 이후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저자는 이처럼 두루 전통교육과 현대교육을 거친 이색적인 경험을 갖고 있는데, 그로 인해 좀 더 넓은 안목으로 지금의 교육 전반을 조망해내기도 한다. 한재훈은 “서당에서 공부한 것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대안교육을 받은 셈”이라고 말한다.

사실 서당에서 이뤄지는 이런 교육 과정은 오늘날 교육의 여러 문제점도 돌아보게 하고 보완할 수 있는 측면을 보여준다. 비록 서당교육이 퇴조했지만 경쟁교육, 서열화교육으로 심하게 굴절된 지금의 교육에 풍성한 대안적 가치를 제시해주는 것이다. 전통교육과 현대교육을 두루 거친 저자는 경계에 서서 그 지점을 적시해준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가르침과 배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배움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의미를 깊게 해석하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위기지학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신만을 위한 배움’으로 이기적 공부처럼 비쳐지기도 하며, 오히려 ‘남을 위한 배움’ ‘위인지학’이 긍정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배움을 통해 앎을 얻고, 그 앎으로 인해 나의 관점과 사유가 성장하고, 그 결과 성숙한 인격을 가진 내가 된다. 배움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나서부터 나의 인격을 성숙시키기까지 이 흐름은 온전히 내 안에서만 흐른다. 나를 벗어나지 않고 내 안에서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흐름, 이것이 바로 ‘위기지학’ 즉, ‘나를 위한 배움’이다.

반면 ‘위인지학(爲人之學)’에서 앎을 취득하는 이유와 앎을 활용하는 방법, 그리고 앎을 통해 기대하는 결과는 현저히 달라진다. ‘남을 위한 배움’은 취득한 앎을 상품 가치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활용하게 된다. 남의 평가에 연연하고 세상에 아부하게 되는, 어떻게든 세상의 눈길을 끌어보겠다는 자신이 배운 학문의 본질정신을 왜곡하는 것으로, ‘곡학아세’로 귀결된다.

이 대목은 최근 국민을 기만하고 국토를 황폐화한 4대강 사업에 관여한 학자들의 태도와 관련해서 많은 점을 시사한다. (사실 4대강에서만 그랬는가만!)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고(양심이 과연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때가 많지만) 오로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권력과 자본에 복무하는 지식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본연의 역할을 외면한 채 지식을 적당히 팔아먹고, 그럼으로써 지식사회의 위기를 불러왔다.

이제 제도로서 서당교육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외형상 변화를 겪지만, 그 안에 내재한 어떤 지속성과 유효성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1세기 훈장 한재훈은 생생한 서당 공부의 경험을 통해 그 지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한국 사회의 교육은 얼마나 심각하게 병들어 있던가. 핀란드 이야기하고, 독일 이야기하고 다 좋은데, 그 병을 치유하기 위해 우리의 역사적 경험도 돌아볼 수 있다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김지환 (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현재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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