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28]

<춘추(春秋)>는 노(魯)나라의 역사책이다.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B.C. 722)부터 애공(哀公) 14년(B.C. 481)까지 242년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춘추>는 비록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고는 하나 단지 노나라만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아니고 노나라를 둘러싼 여러 제후국들과 주 왕실의 역사를 함께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세계사였던 셈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앞지르는 동양 최초의 편년체 역사기록으로서 주대(周代), 특히 춘추시대를 아는 데에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이 문헌은 공자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소위 공자작춘추설(孔子作春秋說)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다름 아닌 <맹자>다.

세상이 쇠퇴하고 도의가 미약해지자 삿된 말과 거친 행동이 일어나니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자식으로서 아비를 죽이는 자도 나타나게 되었다. 공자께서 이런 세태를 우려하여 <춘추>를 지으셨으니 이는 천자(天子)의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알아주는 자도 오직 춘추요, 나를 벌하는 자도 오직 춘추로다” 하셨다.
世衰道微 邪說暴行 有作 臣弑其君者 有之 子弑其父者 有之. 孔子懼作春秋 春秋 天子之事也. 是故 孔子曰 知我者 其惟春秋乎 罪我者 其惟春秋乎. <맹자> 등문공 하

옛날 우임금이 홍수를 막으시니 천하가 평화로워지고 주공이 오랑캐들을 다독이고 맹수를 몰아내니 백성들이 편안해졌으며 공자께서 <춘추>를 완성하시니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였다.
昔者, 禹抑洪水而天下平, 周公兼夷狄驅猛獸而百姓寧. 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 <맹자> 등문공 하

한마디로 난신적자들이 나타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공자가 <춘추>를 지어 역사 판단의 추상같은 기준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후 사마천은 공자작춘추설을 그의 <사기> 공자세가에 포함함으로써 이 설을 역사적 사실로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공자가 말했다. “안 되지, 안 되지.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모습을 보이겠는가?” 이에 공자는 역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춘추(春秋)>를 지었다. 위로는 은공(隱公)에 이르고 아래로는 애공(哀公) 14년에 이르기까지 열두 임금(十二公)의 역사였다. 노나라의 역사에 기반을 두고 주나라를 섬기고 은나라의 제도를 참작해 하(夏), 은(殷), 주(周) 3대를 계승하고 있다. 그 문사(文辭)는 간략하지만 제시하고자 하는 뜻은 넓다. 그래서 오나라와 초나라의 군주가 왕을 자칭했지만 <춘추>에서는 그것을 낮추어 자작(子爵)으로 칭했다. 천토(踐土)의 회맹(會盟)에서는 실제 제후가 주나라의 천자를 부른 것이지만 <춘추>는 그 사실을 피해서, “천자가 하양(河陽)으로 사냥을 나갔다”고 기록했다. 이런 사안들을 들어서 당세(當世)의 법통을 바로잡는 기준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제후들에 대한 폄손(貶損)의 뜻은 후에 군주가 될 사람들이 이를 참고해 실행하게 하는 데 있다. <춘추>의 대의가 행해지게 되면 곧 천하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子曰: 「弗乎弗乎, 君子病没世而名不称焉. 吾道不行矣, 吾何以自見於後世哉?」 乃因史記作春秋, 上至隠公, 下訖哀公十四年, 十二公. 拠魯, 親周, 故殷, 運之三代, 約其文辞而指博. 故呉楚之君自称王, 而春秋貶之曰 「子」; 践土之会実召周天子, 而春秋諱之曰 「天王狩於河陽」: 推此類以縄當世. 貶損之義, 後有王者挙而開之. 春秋之義行, 則天下亂臣賊子懼焉. <사기> 孔子世家

공자는 소송사건을 심리하는 직위에 있을 때에도 문사(文辭)에 걸쳐서는 다른 사람과 상의했고 혼자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춘추>를 지음에 있어서는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했기 때문에 자하(子夏)의 문도들도 어느 한 구절 거들 수가 없었다. 제자들이 <춘추>를 전수받은 뒤, 공자는 말했다.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도 <춘추> 때문일 것이고 나를 단죄하는 사람도 역시 <춘추> 때문일 것이다.”
孔子在位聴訟, 文辞有可與人共者, 弗独有也. 至於為春秋, 筆則筆, 削則削, 子夏之徒不能賛一辞. 弟子受春秋, 孔子曰: 「後世知丘者以春秋, 而罪丘者亦以春秋.」 <사기> 孔子世家

청대의 고증학자 최술(崔述)도 공자가 시경, 역경, 서경 등의 집필이나 편집에 간여한 사실을 일일이 고증하며 반박했지만, 그도 공자가 <춘추>를 지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최술마저도 거역하기 어려운 역사의 권위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말 공자가 <춘추>를 지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려면 복잡한 주변을 살피기보다는 단도직입적으로 <춘추> 그 자체를 살펴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처음 <춘추>를 읽어보는 사람은 누구나 놀란다. ‘이게 역사 기록이야?’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해설이라고 해야 할 전(傳)을 제외하고 <춘추> 본문 그 자체만을 보면 그 내용이 너무나도 단순하기 때문이다. <춘추>는 매년 있었던 기록을 춘하추동 사계절로 나눈 다음, 있었던 사실 몇 가지를 아주 간략하게 남기도 있는데 그 기록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한 장을 넘기는 경우가 별로 없다. 기록이 많지 않은 경우는 원고지 반 장을 채우기 어려울 때도 많다. 1년치 분량이 그렇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기록 첫 해인 은공 원년의 기록 전문(全文)을 보자

元年, 春, 王正月
三月, 公及邾儀父盟于蔑
夏, 五月, 鄭伯克段于鄢
秋, 七月, 天王使宰咺來歸惠公仲子之賵
九月, 及宋人盟于宿
冬, 十有二月, 祭佰來
公子益師卒

이것이 전부다. 노나라 은공 원년, 기원전 722년 한 해 동안 있었던 노나라와 노나라를 둘러싼 제국(諸國)의 역사 전부다. 그 내용도 단순하다. 형식적인 연월 표기를 빼고 나면 그 해에 있었던 일은 3월에 노나라 임금이 주(邾)나라의 의보(儀父)와 멸(蔑)이라는 곳에서 맹약을 체결하였다는 것. 5월에 정(鄭)나라 임금이 언(鄢)이라는 곳에서 단(段)과 싸워 이겼다는 것. 7월에 천왕께서 재상인 훤(咺)을 보내시어 혜공과 중자가 돌아가신 것에 따른 예물을 주셨다는 것. 9월에 송나라 사람들과 숙(宿)이라는 곳에서 동맹을 체결하였다는 것. 12월에 제백(祭佰)이 왔다는 것. 익사(益師)가 죽었다는 것. 그것이 전부다. 전후좌우 사정을 모르면 보아도 무슨 말인지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건조한 기록들이다.

한마디로 <춘추>는 최소한의 연대기일 뿐이다. 누가 죽었다. 누구를 장사지냈다. 언제 일식이 있었다. 누가 누구와 동맹을 체결했다.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를 쳐서 어떤 땅을 빼앗았다. 언제 메뚜기 피해가 있었다. 벼멸구 피해가 있었다. 누가 어느 나라로 망명하였다. 누가 누구를 죽였다. 대부분 그런 기록이고 그런 기록들이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기록들을 공자가 썼다고 생각하는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정상적인 비판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록의 둘째 장을 넘기기 전에 이미 공자가 이것을 썼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은 직업적 사관이 쓴 것에 불과하다. 물론 대를 이어 여러 사람이 썼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직업적 사관들일수록 그들만의 고유한 기록 원칙과 까다로운 기준,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그것은 오늘날 남아 있는 기록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듯이 필연적으로 완고하고 고지식한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춘추>의 마지막은 애공 16년으로 공자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춘추>는 그 해의 일로 정월에 위(衛)나라 세자 괴외(蒯聵)가 척(戚)으로부터 위나라에 잠입하였다는 것, 그리고 위나라 임금 첩(輒)이 노나라로 망명을 왔다는 것, 2월에는 위나라의 선성(還成)이 송나라로 망명을 갔다는 것, 그리고 여름 사월 기축날에 공자가 죽었다는 것, 이것이 전체 242년에 걸친 긴 기록의 대미(大尾)였다. 이름 모를 사관은 심지어 그 해 가을과 겨울에 있었던 일도 기록하지 않았다. 마지막 해의 기록마저 쓰다가 말은 셈이다. 그 사관은 모르기는 하지만 공자와 깊은 관계를 가졌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제자였을 수도 있다. 그가 孔丘卒을 쓰고 더 이상의 기록을 하지 않은 것은 절망 내지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역사는 단지 침묵으로 대답하고 있을 뿐이다.

이후 <춘추>에 관한 첫 언급이 나타난 것이 <맹자>의 전술한 기록이다. 맹자는 살부시군(殺父弑君)의 무질서를 우려하여 공자가 <춘추>를 지었으며 거기에 추상같은 기준과 원칙이 나타나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였다고 했다. 이 논리는 이후의 역사에서 거의 변경되지 않고 유지된 듯하다.

만약 이런 논리를 맹자가 처음으로 개발하였다면 나는 감히 맹자가 공자를 왜곡한 첫 인물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직업적 사관이 가진 다분히 진부하고 융통성 없는 원칙, 좋게 보아도 전통에 충실한 고집스런 기록 관례를 터무니없게도 공자의 정치윤리적 원칙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봉건적 질서를 옹호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훗날 공자가 봉건 질서의 회복을 목표로 삼았던 인물로 낙인찍히는 데에 절대적 기여를 하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마천의 기록은 이 시각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이 왜곡을 한층 더 철저히 굳힌 것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었다. <춘추공양전>은 <춘추>에 대한 해설을 빌미로 이 왜곡에 철저히 학문적 근거를 구축해 주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 <춘추>에 세부적인 역사적 사실을 보다 자세하게 부연해 놓은 역사서라고 한다면 <공양전>은 역사서가 아니라 춘추를 확고한 왕권을 중심으로 교묘하게 질서화한 정치이념서(政治理念書)였다.

<공양전>은 공자가 <춘추>를 지었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공자가 죽었다”(孔丘卒)는 기록이 들어간 기원전 479년의 기록과 그 전해의 기록을 삭제하고 기원전 481년의 기록을 <춘추>의 마지막 기록으로 만들었다. 공자가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기록하였다는 모순된 사실을 감추기 위한 방법이었다.

<공양전>의 노력은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 전한대의 동중서(董仲舒)는 공양학(公羊學)으로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 나갔고 이후 공양학파(公羊學派)는 이 이념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춘추>의 이름으로 추진된 정당한 조치도 있었지만 정치적 반대파를 죽이거나 몰아내는 데에서 소위 포폄(褒貶)의 근거가 된 것도 다름 아닌 <춘추>였다. 공자가 죽고 나자 공자는 온갖 정치적 · 사상적 목적에 이리저리 이용되었지만 <춘추>만큼 철저히 또 길게 이용된 사례는 많지 않다. 그 모든 것은 무엇보다 공자가 <춘추>를 지었다고 하는 터무니없는 맹자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춘추>는 공자가 짓지 않았다. 이 단순한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도, 그보다 한 술 더 떠서 법가적 사상까지 끌어들인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도, 춘추필법도, 춘추직필도, 난신적자도, 사문난적도, 무슨 무슨 포폄도, 심지어 강유위(康有爲)의 변법자강(變法自强)도 모두 근거를 잃게 된다. 근거를 잃어야 한다. 그리하여 공자를 공자가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풀어내어야 한다. 그래야만 오늘날이 공자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게 된다. 그러지 않고 공자를 온갖 역사적 굴레에 그대로 묶어둔다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서푼어치도 안 되는 저 경박한 구호 앞에서도 공자는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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