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영화 <페어웰, 마이 퀸>, 브느와 자코 감독, 2012년작

 
마리 앙투아네트. 왠지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묘한 애상에 젖게 된다. 어렸을 때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책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읽고, 1979년에 제작된 일본 만화영화를 본 여자아이들은 다들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세계적으로 히트한 이 TV시리즈는 우리나라에서도 1993년과 1998년에 KBS-2TV를 통해 전 40편이 연속물로 방영되었다. 프랑스 대혁명도, 민중봉기도 아닌 로맨스의 애절함만이 지금은 기억에 남아 있다. 독자는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감정들, 하루아침에 불행의 나락에 떨어진 고귀한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떤 몇몇 사람이 겪는 극도의 낭만성과 사랑의 절절함을 뒷받침하는 장치들로 ‘혁명’을 먼저 접해버린 터라, 여전히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서는 복잡한 감정이 든다. 여전히 프랑스 대혁명을 떠올리면, 이후에 배운 역사적 지식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먼저 떠오른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비운의 왕비’ 같다. 거기에도 일종의 낭만적 환상이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한 사람이 동시대 역사 전체를 대표하는 것 같은 환상에 더해, 그의 모든 행위에 대해 ‘비운’이라는 허상을 씌운다. 아름다운 비련의 여주인공, 그것 이외에는 더 알고 싶지도 않은 것일까.

성난 민심 vs 세상물정 모르는 왕궁

지난 연말에 보았던 영화 <페어웰, 마이 퀸(Farewell My Queen, 2012)>은 솔직히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 영화였다. 그런데 그날 극장은 만원이었다. 규모가 작은 극장이긴 했지만 가끔 가는 내게도 그렇게 꽉 찬 건 처음이었다. 연말 송년모임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영화는 여럿 있지만, 이 영화는 좀 특이했다. 어떤 환상이나 기대를 가지고 봤다면 하품 밖에 안 나올 수도 있었다. 관객에게 대단한 몰입을 요구하지만, 이야기 전개는 전혀 극적이지 않다. 잘 알려진 인물의 잘 알려진 ‘역사적 시간’, 그러니까 마리 앙투아네트가 바스티유 감옥의 역사적인 새벽을 맞던 나흘간을 다루고 있지만 조금도 친절하지 않다. 이 역사에 대해 뭘 좀 아는 관객이라고 해도 흥미진진한 영화는 아니었다.

주인공은 왕비에게 책을 읽어주는 하녀 시도니(레아 세이두 분)이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다이앤 크루거 분)는 시도니에게 관찰당하는 대상이다. 시도니는 왕비를 깊이 흠모한다. 충성심과 사랑이 뒤섞인 열렬한 숭배다. 시도니에게 있어 왕비의 존재는 그저 곁에서 모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분이다.

1789년 7월 14일 혁명의 새벽, 왕정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이 시민들에게 함락되고 귀족들의 영지는 습격당한다. ‘나쁜 소문’들은 점점 궁의 분위기까지 바꿔놓고, ‘대혁명을 위한 268명의 살생부’가 드디어 베르사이유 궁에까지 입수된다. 왕비는 두 번째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살생부에는 왕비와 함께 방탕을 일삼은 폴리냑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귀족들과 하인들은 모두 성을 떠나려 하고, 마리는 숨겨둔 자신의 동성애인 가브리엘 폴리냑(비르지니 르도앵 분)을 살리기 위해 시도니에게, 시도니로서는 절대 거절하지 못할 마지막 임무를 맡긴다.

시도니는 모든 것을 지켜보지만 아무것에도 개입할 수 없는 처지다. 그저 명령을 받드는 ‘도구’에 가깝다. 우리가 (문화콘텐츠 속) 왕비에게 감정이입을 하건 말건, 우리들 다수는 시도니와 비슷한 처지다. 왕비는 그런 시도니에게 권력자다운 비정한 명령을 내린다. 왕비가 사랑하는 폴리냑을 위해, 폴리냑의 옷을 입고 폴리냑의 마차에 탄 채 성난 군중 속을 통과해야 하는 시도니. “나는 사라지고 말겠지”라는 시도니의 마지막 독백으로 영화는 끝난다.

 
베르사유 외양간의 비밀

실은 영화 <페어웰, 마이 퀸>을 보는 동안 나는 왕비의 표정을 관찰하는 데 주목했던 것 같다.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은, 밀랍인형처럼 굳은 왕비의 나른하고 생기 없는 표정 말이다. 융 심리학자 로버트 존슨의 책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의 한 부분이 떠올라서였다. 저자는 ‘우리가 원치 않는 요소를 상징적으로 살아낼 때 문화는 비로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건강한 사회는 모두 풍요로운 의례가 생활화되어 있다’는 주장을 펴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화를 소개한다.

“인간이 그림자를 통합하려는 시도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사례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다. 왕비는 불현듯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의 삶이 따분해졌다. 어느 날 뭔가 땅과 접촉하기를 원한다는 영감을 받은 그녀는 직접 소젖을 짜보기로 했다. 그리고 즉시 궁전 안에 외양간을 지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소젖을 짜는 왕비라니! 이 일을 위해 프랑스 최고의 건축가를 동원해 외양간을 지었다(지금도 베르사유 궁전에 가면 이 외양간을 볼 수 있는데 대단히 아름답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어서 품종이 좋은 젖소를 스위스에서 수입하는 등 모든 준비가 끝난 날, 왕비는 다리 세 개 달린 높은 의자에 앉아 막 젖을 짜는 여인의 일을 시작하려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이 일이 혐오스럽게 느껴진 왕비는 하녀더러 젖을 짜라고 명한다.

왕비의 원래 충동은 정확했다. 왕비에게는 궁정의 형식적인 생활과 균형을 맞출 정반대의 삶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일 왕비가 젖을 짜는 의례를 지속했더라면 그녀의 운명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비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궁정의 대지적 측면을 우유 짜기 같은 단순한 행위로 살아낼 수도 있었을 텐데.” (74쪽, ‘의례로 그림자 표현하기’ 중에서)

왕비는 끝내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뿐이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이를 희생시키는 왕비의 선택. 부리던 하녀 하나쯤 사지로 내보내는 일에 왕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늘 저녁엔 무슨 책을 읽을까에 대한 고민의 십분의 일만큼도 하지 않는다. 그 핏기 하나 없는 권력자의 얼굴은 흡사 뱀파이어를 연상시켰다. 피가 흐르는 인간이어서는 그 절대권력의 자리를 지킬 수 없는 것일까. 마리 앙투아네트의 진짜 얼굴은 어떤 것이었을까.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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