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9

 

지난 번 보았듯이,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이스라엘 백성이 물으면 어찌 답해야겠느냐는 모세의 질문에 그 신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나다”(I am that I am) 놀라운 통찰이 담긴 한 마디이다. 온갖 수식어를 동원하여 인간적 형상으로 신을 설명하던 다신교적 세상에서, 신을 정말 신답게, 참으로 유일신적으로 설명한 가장 결정적인 사례라 할만한 구절이다. “나는 나”라고 말하는 신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 아닌 다른 개념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자신에게 두는, 그런 의미의 자존자, 근원자, 한 마디로 절대자이다.

‘상대’가 마주하고 있는 것(對)에 매여 있다면, ‘절대’는 그것(對)을 끊어버렸다(絶). 마주하고 있는 것을 끊었으니 그에 매이지 않으며, 매이지 않으니 ‘자유’ 자체이다. 자유(自由)는 ‘스스로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피조물 가운데 스스로 말미암은 것은 없다. 스스로 말미암은 자, 진정한 의미의 자유자 내지 자존자는 신뿐이다. “I am that I am”이라고 스스로를 표명한 성서적 신관에 그런 입장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 신은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언제나 넘어서 있다. 그래서 초월자이고 무한자이며, 절대자인 것이다.

신이 초월자, 자유자, 절대자라면, 신을 그렇지 못한 것처럼 어떤 특정한 행위나 개념 안에 가두어 두는 행위는 우상 숭배에 해당한다. 신은 나만 안다고, 그래서 나만 옳다고, 또 신이 어떤 특정한 곳에만 있다고 고집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신은 이렇게 기도하면 저런 복을 주시는 분이라며, 어떤 기계적인 틀 안에 가두어두는 행위도 우상숭배의 위험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도라고 말해질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도덕경 1장)라고 하듯이, 진리는 어떤 특정한 곳에 갇히지 않는다. “나는 나”라는 언명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신은 창조주이고 절대자이다. 신은 ‘있다’는 말에도 갇히지 않고 ‘없다’는 말에도 매이지 않는다. 최근 “신은 없을 껄! 걱정하지 말고 인생을 즐기라”(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며 무신론을 광고하고 다니는 런던의 이색 버스나 그에 발끈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나, 사실 신을 상대성 영역에 떨어뜨리기는 매한가지이다. 신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싸우는 것은 오십보 백보이다. 모두가 신을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 차원에 가두어두는 일이다.

성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신은 그 성서 안에도 갇히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그 그리스도교 안에도 갇히지 않는다. 신이 성서 안에만 들어있는 것처럼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서라는 책과 문자만 살려두고 신을 죽이는 셈이다. 신이 그리스도교 안에 갇힌 것처럼 말하는 이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교라는 제도, 예배당이라는 건물은 신이 거주하기 너무 좁은 곳이다. 그 곳에 갇힌 신은 이미 신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그러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일 뿐이다. 온 우주의 창조주가 어찌 문자나 제도 안에 갇히겠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이 존재한다면서 사실상 신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고백과 별반 다르지 않은 다짐에 머물 때가 많다. 논리적 차원에서 그것은 신을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오류일 수도 있다. 신을 말로는 유일신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최고신처럼 생각하는 것이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신이라고 해도 그것 역시 ‘낮은’ 신에 대한 상대적 존재이고, 다신교적 개념이다. 신을 보이지 않지만 저 구름 너머 어딘가 존재하는 어떤 형상을 지닌 존재처럼 생각하면, 그 신은 외계인이 되기 십상이다.

신은 피조물이 아닌, 조물주이다. 삼라만상의 근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있을 수 있도록 해준 생명의 원천이다. 신은 사물 하나 하나와 연결되지만 그에 매이거나 갇히지 않는다. 모든 피조물, 인간이 만들어낸 일체의 것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을 넘어선 분, 바로 초월자이다. 물론 초월자라 말한다고 해서 그저 인간이나 사물에 무관심한 분이라는 뜻이 아니다. 전 우주의 모든 것, 그 한 복판에 계시되, 그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다. 신은 나의 일거수 일투족 안에 계시되, 내 안에 있는 신이 신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슬람의 알 할라즈라는 신비주의자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곧 진리이다.” 그러나 그는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죽었고, 내 안에 신으로 가득찼다는 뜻이었다. 결국 신이 진리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오해를 받아 처형당했다. 이슬람 신비주의자였지만, 그는 예수야말로 인간과 신이 합일된 최고의 신비주의자라고 간주했다.

바울로도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고 고백했다. 이것 역시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 자기는 죽고 우주적 진리를 자기 안에서 보게 된 자의 고백이다. 신을 숨쉬고 잠자는 모든 곳에서 보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나는 나다”라는 촌철살인과 같은 한 마디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 마당에 어찌 그 신이 교리 안에, 교회 안에, 문자 안에, 내 안에 다 갇힌다고 하겠는가. “나는 나”라고 말한 이 신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수 밖에 없는 분이다. ‘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어떻게 보실까’ 질문한다면, 그 답도 분명하다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