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평신도 교양 - 3]

들어가며: 500만 신자, 다양성의 시대, 갈등의 시대

지난 글에서 5백만 신자 시대의 큰 다양성을 생각해 보았다. 사회적 출신성분(?)도, 입교 동기도, 종교체험도 다양한 하느님의 백성이다. 시대적 흐름도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한다. 그래서 신자들 간에, 성직자들 간에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고 일치를 지향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있다. 하지만 교회에 다수결의 원칙이나 양적 민주주의적 방식을 직접 도입할 수는 없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때마침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신 새로운 키워드가 있다. 이번 글은 그 낱말에 집중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아니다

미래의 한국가톨릭교회에 ‘(다수결의) 민주주의’가 필요할까? 투표를 통해 평신도 단체의 대표를 뽑는 일은 어느 정도 익숙하다. 그런데 신자의 직접/간접 투표로 본당 신부나 주교를 선출해야 할까? 그렇다면 과연, 교황도? 물론, ‘아니오’이다. 스위스의 한 가톨릭 통신사는,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는 정당이나 민주적 원리로 운영되는 단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기사 제목이 인상적이다. “선거 대신 성품(Weihe statt Wahl)”

하지만 성직주의, 중앙집권, 권력집중, 관료주의, 상명하복 등의 ‘반민주적 문화’는 분명히 복음적이지 않다. 더구나 어느 정도 민주화된 사회에 익숙한 21세기의 한국 신자들 사이에 ‘어떤 느낌’이 확산된 지 오래되었다. 바로 한국가톨릭교회에 ‘더 민주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느낌이다. 위에서 열거한 ‘반민주적 문화’를 점차 줄여가야 한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교회에 ‘다수결의 민주주의’를 도입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적절한 신학적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답답했다.

‘공의회 정신’이다

필자의 좁은 의견일지 모르지만, 교회에 ‘더 민주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가톨릭 신자들은 ‘민주주의’란 낱말보다 ‘공의회 정신’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민주적 삶’ 보다 ‘공의회적 삶’이란 말을 쓰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일단 실용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많은 문맥에서 ‘공의회 정신’은 ‘민주주의’의 대용어로 훌륭하다. 신학적으로 보면, 모두가 참여하고, 모든 것을 논의할 수 있고, 막힘없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나눌 수 있으며, 서로의 인격과 원의를 존중하고, 일치를 지향하며, 성경적이고, 교회 전통에 충실한 신앙언어라는 점에서, ‘공의회 정신’은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나은 말이기도 하다.

‘공의회 정신’은 500만 시대의 한국 평신도에게 새롭게 다가올 언어가 될 수 있다. 다수결이나 직접투표를 포함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 점이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낱말은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급에서 무척 두드러지는 단어이기도 하다.

공의회, 주교들의 회합

우선 가톨릭 신학의 용어를 간략히 정리해야 되겠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은 공의회를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는 주교들의 회합’으로 정의하고, 세계공의회를 말할 때는 ‘시노도스(σύνοδος)’란 말도 함께 사용된다고 한다.

이 사전의 충실한 서술에서 두 가지 점이 눈에 띠었다. 첫째는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문제도 다룬 혼합 공의회들’을 첫머리에서 제시한 점이다. 둘째, 서술의 말미에서 ‘전 세계 주교들이 참여하는 회의’로서 현대 의회와 비교한 점이다. 이 비교는 양자의 현격한 차이에 초점을 맞추었다.

공의회 정신

그런데 독일어권 가톨릭계 신학사전으로 권위 있는 『교회와 신학을 위한 사전(LThK)』 3판의 서술은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우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미 ‘일반 공의회와 ‘지역 공의회’를 나누는 데서도 볼 수 있듯, 고대부터 다양한 차원의 공의회가 존재했다. 그리고 공의회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에서 현대의 의회주의의 영향력을 부인할 수 없다고 서술했다.

이 독일 신학 사전은 공의회와 관련된 신학 용어를 다양하게 소개하는데 그 중에 두 가지가 흥미롭다. 첫째는 ‘공의회의 원리’라는 개념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특히 70년대부터 국가별 공의회와 교구 공의회가 잦아지면서 주목받는 개념이라고 소개된 이 말은 ‘교회의 모든 지체가 원칙적으로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의회의 원리’는 민주 사회의 공동 결정권, 평등권, 분쟁규정 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둘째는 ‘공의회성’이다. 이는 교회에 꼭 필요한 개념으로서, 쉽게 말하자면 ‘교회의 믿음은 하나이지만, 우리는 함께 그 믿음을 체험하고 선포하고 지키고 정의한다.’는 것이다. 믿음 자체는 오직 하나로서 ‘단일한 정체성’을 지니지만, 신앙인은 그 믿음을 ‘이 세상에서 함께 책임지는 증인들’이기 때문에 공의회성은 교회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최초의 공의회인 갈라티아서 2장의 ‘예루살렘 사도회의’부터 모든 공의회는 ‘공의회성의 한 양식’이다.

‘공의회의 원리’나 ‘공의회성’ 등의 다양한 용어의 차이를 전문적으로 구분하는 일은 잠시 미뤄두자. 여러 가지 용어가 더 있는데 부디 이 분야의 전문가가 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 대신 이 말을 우리의 맥락에서 ‘공의회 정신’이란 말로 써 보려고 한다. ‘공의회 정신’은 우리말로 조금 더 쉽고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공의회’

그런데 이 용어가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에서 자주 출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필자가 받은 신선한 느낌을 독자와 나누고 싶다. 필자가 ‘전혀 전문적이지 않게’ 관찰한 바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말을 다음의 다섯 가지 맥락에서 주로 사용하는 듯하다.

첫째,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가리킬 때, 둘째, 주로 동방정교회와 대화하는 교회일치의 맥락에서 사용한다. 이 두 가지 맥락이 가장 많고, 이 말의 가장 전통적인 쓰임새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공의회 자체의 개혁

셋째는 교황이 ‘주교 공의회 자체의 개혁’의 맥락에서 이 말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교황은, 공의회가 교황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보좌하는데 머무르고 책임 있고 실질이고 사려 깊은 제안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아쉬워하는 듯하다. 역동성이 죽어버린 공의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형식적인 면을 너무 엄격히 적용하지 말 것도 주문했다. 보스톤의 예수회원 크리스챤슨 신부는 교황이 직접 이 일을 ‘빵 굽기’에 비유했다고 전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주교 공의회라는 빵이 “아직 절반 밖에 구워지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주교 공의회가 아직도 발전과정에 있다는 뜻이다.

교회 통치의 맥락

넷째는 교회 통치의 맥락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 스파다로 신부와의 인터뷰에서 “백성, 주교 교황이 함께 걸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시노도스(σύνοδος)’란 말이 본디 ‘함께 가는 길’이란 의미이므로, 이 표현 자체가 공의회적 정신을 듬뿍 담은 말이다. 교황은 이어 “다양한 차원에서 공의회 정신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동방교회에서 “주교단체성과 공의회 정신의 전승”을 배워야 한다고도 했다. 이 말은 『복음의 기쁨』에서 거의 그대로 사용되었고(246항), “합의체적 정신”이란 말도 찾을 수 있다(32항). 앞서 언급한 크리스챤슨 신부는 공의회 정신이 프란치스코 종교 개혁의 심장일 것 같다고 보았다.

새로운 삶의 양식

다섯째로 가톨릭 신자의 ‘새로운 삶의 양식’이라는 맥락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 한 달 만에 전 세계 교회를 이끄는데 조언을 받기 위해 추기경 8명으로 구성된 자문단을 만들었다. 교황은 ‘아웃사이더 자문 그룹’으로 이들을 부르며, 그냥 몇 마디 조언이나 의례적인 조언이 아니라 실질적인 조언을 원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현재 활동 중이며 아직 문헌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자문단의 비서인 세메라로 주교는 이탈리아 언론 La Stampa와의 인터뷰에서 ‘분권화’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는 ‘분권화’가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도, 교회의 구조나 카리스마와 관련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새로운 삶의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분권화’와 함께 ‘공의회 정신’이란 용어를 주의 깊게 사용했다. 이 말 또한 『복음의 기쁨』에서 사용되었는데, 교황은 1인칭으로 이렇게 확언 한다. “저는 건실한 ‘분권화’를 증진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깁니다.(16항)”

섣부른 예단일지 모르지만, 이 말을 교회의 구조나 권력에 관련된 말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이해해 보면, 교계 구조의 중심을 바라보고 살지 말고, 내 주위에 가난한 사람을 먼저 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권력관계’를 연상시키는 ‘분권화’란 낱말 보다는 ‘탈중앙집중화’ 또는 ‘탈중심화’로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로마가 아니라 자신의 마을과 나라를 먼저 살피라는 권고 같기도 하다.

나가며: 민주적 삶과 공의회적 삶

지면의 한계를 핑계 삼아 이번에는 여기서 마쳐야 하겠다. 사실 ‘민주주의’는 ‘공의회 정신’과는 퍽 다른 의미의 말이다. 참고로, 민주주의가 더 오래된 말이다. 고대 그리스는 신약성경보다 오래되었으니까. 민주주의에서 직접투표를 제외하면 공의회 정신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공의회 정신은 새로운 삶의 양식 또는 새로운 영성으로서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음 글에서 조금 더 나눠보겠다.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서,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학을 공부했다. ‘평신도 신학자’의 자리를 기쁘게 모색하는, 두 아이의 아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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