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선배님. ‘각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배님. ‘각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입니다.

“새로운 미국의 변화를 주창하는 오바마 당선인과 대한민국의 새로운 변화를 제기한 이명박 정부의 비전이 닮은꼴........” (한겨레신문 11월6일자)

큰일 났습니다. ‘각하’께서 실성하신 게 아닌지 심히 우려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국의 노동자 안위를 걱정하며 보호무역을 강조하고, 일자리 창출을 위하여 친환경 산업의 육성을 공약한데다가, 무한 경쟁의 시장 경제를 드디어 불신한 나머지 국가의 적극적 시장 개입을 천명한 데서 머물지 않고, 부자의 감세가 아니라 빈자에 대한 지원을 국부의 기본으로 삼겠다는, 나아가 보장 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는 중하류층을 위하여 보험과 의료의 민영화를 되돌려 국유화 하겠다는, 얼핏 보면 거의 사회주의로의 전환으로 보이는 초강경 조치들을 ‘벼락처럼’ 마구 쏟아놓는 오바마와 자기가 닮았다고 우기는 것은 필경 대한민국의 열렬한 뉴라이트와 절절한 보수 세력에게 최소한 깊은 상처로 남을 것이기에 제정신을 가진 분이라면 그런 선언을 하실 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께서 실성을 하신 것이 아닌지 심히 우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진심입니다.

대세는 붉은 악마였습니다

얼핏 예전의 골 때렸던 삽화 하나가 떠오릅니다. 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모든 국민은 ‘붉은 악마’가 되었고 진한 감동의 축제를 즐겼습니다. 물론 그 때도 얼빠진, 소위 뉴라이트의 선배들이 붉은 악마는 하나님 성령의 충만을 방해하는 것이니 ‘하얀 천사’로 응원단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개주접을 떨다가 제풀에 잠잠해진 일이 있긴 있었습니다만 대세는 붉은 악마였습니다.

붉은 색이 어떤 색입니까? 자유당 시절 이래로 바로 지금까지 지긋지긋하게 우리를 괴롭혀 온 소위 반공 이데올로기, 그것 아닙니까. 레드 콤플렉스 말입니다. 하여 붉은 색이야말로 지금은 한나라당이라고 정체를 바꿔 ‘검은 개가 돼지인 척’하고 자빠졌는 친일파의 후손들이 전통적으로 경원해 왔던 색이며 심지어 70년 대 말에는 표지 색깔이 붉은 색인 이유로 판금조처를 당했던 책도 부지기수 아니였습니까.

그렇게 붉은 색을 싫어하던 인간들이,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고 심지어 제 자식이 그림을 그릴 때에도 붉은 색을 쓰지 말라고 했을 법한 그 작자들이 TV 카메라 앞에서 온 몸을 붉은 색으로 도배하고, 마치 인육 구울 준비를 하고 있는 식인종들처럼 얼굴을 번들거리면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응원하고 있음을 보이려는 피어린 열정 하나만으로 목 터지게 대한민국을 외쳤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날 이후로 우리 팀을 응원하지 않았고 덕분에 팔강전과 사강전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늑대 앞에 꼬랑지를 내리는

정치의 근본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그저 웃어넘기기에는 너무나 처량합니다. 자국의 민중들에게는 끝없이 악랄한 친부팽빈(親富烹貧)의 칼날을 휘두르며 독선과 아집의 명박산성에서 유유자적하던 무시무시한 대통령께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대통령이 바뀐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늑대 앞에 꼬랑지를 내리는 하룻강아지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서글픈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의 정체가, 알고 보니 별 것 아니라는 생각에 치가 떨리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선배님, 생각해 보십시오. 하교 길에 언제나 골목 어귀에 있다가 건들건들 걸어와서는 “야 이 새끼. 떠들지 말고.. 돈 있냐? 이 엉아가 배가 조금 고프거든. 있는 돈 다 꺼내봐. 없어? 너 털어서 나오면 백 원에 한 대다..” 어쩌구 하던, 참으로 무서운 선배가 어느 날 다른 학교 다니는 내 친구에게 허벌나게 줘 터지고 시쳇말로 눈탱이가 밤탱이 되는 모습을 보는 심정이 꼭 이럴 것입니다. 내 친구에게 얻어터지는 선배, 그 선배에게 밤낮 삥이나 뜯기는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건 절망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절망입니다.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폭력을 자행하는 미국의 일방주의를 우리 학창시절 ‘미제국주의’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줄여서 ‘미제’라고 불렀고 우리는 자주 ‘미제타도’를 외쳤던 것입니다. 레이건과 부시는 전두환과 함께 교정에서 허수아비가 되어 화형식에 처해지기 일쑤였고 우리는 적어도 정신적으로만은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굴복이 다 뭡니까. 광주학살의 근본적 책임이 그 놈들에게 있다고 굳게 믿은 우리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맨 주먹으로라도 그들을 단죄하겠노라고 울면서 주먹을 쥐었던 것입니다. 상대가 미국일지라도 아닌 건 아닌 거였습니다. 그게 우리 민족의 깡이요 자부심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우리는 그저 연약한 대학생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일국의 대통령이......

아닌 사람의 아무 것도 아닌 행보를 대서특필하는 신문

선배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명박씨가 미국의 대통령이 누가 되었건 상관없이 그저 지금처럼 국민을 조지고 북한을 적대시하고 오만방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실체가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서글픈 현실이 싫은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서 경제를 살려달라고 애걸했던 이 국민들이 짜증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의 아무 것도 아닌 행보를 대서특필하는 신문이 우스운 것이고 이제는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는 이 정권으로 인하여 우리 국민들까지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정말 너무너무 억울한 것입니다. 대저 미국의 대선이 무엇이기에 공중파 방송 3사가 나서서 하루 종일 방송을 해대고 오바마의 일생을 낭독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선배님. 이제는 다시 신문을 뒤적거리지 않아도 다 외울 지경입니다. 1961년생이고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나랑 동갑이라고 하더군요) 케냐 출신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 인도네시아에서 지낸 일이 있고 하와이에서 컸으며 하버드 로스쿨에서 권위 있는 무슨 잡지 편집장을 했고 로우펌의 고액 연봉을 뿌리친 채 시카고로 들어가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고...... (끼적대다 보니 전혀 명박스럽지 않은 인물이긴 하네요)

물론 개인적으로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것이 좋긴 합니다. 허나 저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벌써 자국의 노동자를 위해 한미 FTA를 손 봐야 한다고 대갈일성을 치고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유는 우리가 쟁취해야만 하는 것... 그 어느 것도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저, 다른 나라에서 볼 때 우리 국민을 대표하는 것으로 오해할 것이 분명한 우리의 ‘각하’께서 더 이상 쪽이나 팔리지 않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이제 자기 혼자 소위 ‘무한 자유 자본주의’를 외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기사... 그럴 것 같으면 벌써 그랬겠지요.

선배님. 오늘 목요일입니다. 레지오도 없고 일도 일찍 끝나는데... 그리고 비도 올 것 같은데 우리 술이나 한 잔 빱시다. 어제는 우리 마누라가 얼큰하게 취했다고 전화가 와서, 가서 모시고 왔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당당한 ‘내 차례’입니다. 오늘은 그저 노오란 대접에 뽀얀 막걸리를 따라서 들이킵시다. 그러다 보면 고향의, 잎 떨어낸 감나무가 떠오르기도 하겠지요. 그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파란 하늘과 발그레한 연시의 그림말입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다른기사 보기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