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 배선영]

ⓒ배선영
이상형의 사람을 만났다. 나도 모르게 애인을 그 사람과 비교한다. ‘내 애인은 왜 저렇지 못하지?’ 말은 못하고 머릿속으로 못마땅해 하다가 별 것 아닌 일로 애인에게 짜증을 낸다.

애인과의 앞날을 생각하면 막막하다. 그 놈의 돈이 문제다. 과연 둘이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에게 미래가 있기는 할까? 답답한 마음을 쏟아내다가 상대방의 신경을 긁고 만다.

연락을 끊고 지낸 것은 아니지만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는 가운데 며칠을 보낸다. 그 사이 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본다. 더 정확하게는 이별에 대해 고려하는 것이다. 헤어지고 혼자가 되면 나는 괜찮을까? 이제 힘들면 누구에게 위로를 받아야 하지? 계산기 두드리듯이 득과 실을 따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스스로가 한심하다.

이 관계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 답을 찾지 못한 채, 애인을 만난다. 그리고는 기어코 이별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예상과 한참 다르다.

“헤어지는 것에 대해 언제부터 생각했어? 난 1년 전부터 생각해왔어. 우리 안 맞잖아.”

이런, 낭패다. 난 5개월 전부터 생각했는데―. 왠지 모르게 억울하다. 헤어지고 싶은 티를 전혀 내지 않았기에 배신감마저 느낀다.

헤어짐에 대해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왜 아닌 척 했냐고 물으니 “막상 얼굴 보면 사랑스럽기만 했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음- 나쁘지 않군. 마음이 누그러진다.

그래도 왜 헤어지고 싶었는지, 둘의 다른 점이 서로를 어떻게 불편하게 하는지 따져본다. 큰 오해가 있었음이 드러난다. 연인, 가족, 친구이자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는 동지로 같은 꿈을 꾸며 살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의 모습은 ‘나 혼자 색칠하고, 오려붙이고, 꾸며놓은 작품’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우리가 같은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나는, 그의 사는 모습을 보며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래서 자주 논쟁을 하고는 했다. 넌 과자를 좋아하고 나는 과일을 좋아하는 취향의 차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그 사소한 차이들이 어떤 가치를 중점에 두고 있는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둘 사이에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마 나는 이 근본적인 차이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치관이 어긋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그도 나와 비슷하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편한 쪽으로 생각해왔다.

원하는 삶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이 확실해졌으니 이제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 그 이상의 논쟁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너도 좋아하라는 강요가 될 것이고 서로에 대한 피로감만 쌓일 것이 뻔하다. 그래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앞으로도 이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 초점이 맞춰진다.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다를 뿐 아니라, 언제 안정될지 모르는 경제적 여건도 이별이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한 몫하고 있다. 책임져야 할 가족들과 현재의 경제 사정에 대해 냉정하게 점검해본다. 답이 안 나온다. 헤어지기로 한다. 막상 헤어지려니 아쉬워서 한 달 정도 떨어져 있어 보기로 한다. 잠시 침묵.

“나 이력서 넣은 곳에서 떨어지면 네가 위로해 줘야 하는데……. 그리고 만약에 붙으면 너한테 가장 축하받고 싶을 텐데…….”

이 말에 심각한 분위기가 풀린다. 미래에 대한 걱정 따위는 그만하고 즐겁게 살자고 대충 마무리를 한다.

집에 와서 좀 전의 상황을 곰곰이 돌이켜 본다. 혹시 3년 만에 연인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내 인생에 더 이상 사랑이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제는 설레지도 애틋하지도 끌리지도 않는다. 어떤 느낌이 들어야 사랑인 것일까. 나는 정말 그를 사랑하고 있나?

다음 날, 열심히 작업 중인데 찾아와서는 책을 꺼낸다. 웬일로 책을? 무슨 책이냐고 물으니 책을 들어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모든 것>과 <동서양 고전탐사>. 허! 책을 자세히 살펴보니 산지 꽤 되었는데, 읽은 흔적이 전혀 없다.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어려운 책을 골라온 모양이다. 허세를 부리며 자신은 책을 읽을 것이니 할 일 하란다. 내 이상형인 지적인 남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 할 일을 하면서 틈틈이 살펴보니 정말 책을 읽고 있다. 별로 재미있는 책이 아닌 것 같던데……. 30분쯤 지났을까. 책이 아니라 핸드폰을 보고 있다. 쯧쯧. 그럼 그렇지.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다시 책을 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 고는 소리가 난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난다. 어떻게 보면 귀엽기도 하다.

생각해보니 그와 있을 때, 나는 참 많이 웃는다. 그리고 아주 솔직하다. 내 이상형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는 위축되지 않고 나를 지적(知的)성애자라고 놀린다.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즐겁다. 이것 외에 또 무엇이 필요할까.

정말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추기로 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세상이 핑크빛이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은 잠시 동안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평생 함께여야 한다는 생각도 멈추기로 한다. 세상일이 절대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매일 깨닫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를 연인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로 한다. 사랑도 미래도 별 것 아님을, 나도 그도 단지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한 인간이라는 것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앞으로도 서로의 다름에 불편해할 것이고, 미래를 생각하며 막막해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지금처럼 생각을 멈추고, 관계에서 물러나보는 것― 연애를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
 

 
 

배선영 (다리아)
대책 없지만,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살고 있는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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