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밀양 고(故) 유한숙 씨 아들 유동환 씨

▲ 유동환 씨가 11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그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말이 없고 가부장적인 면도 많았지만 매사 ‘내 일은 내가 책임지고 한다’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28년 전, 건설회사 임원직에서 퇴직하며 귀향했다. 돼지를 기르며 가족들과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고정마을이다.

동네에 765㎸ 송전탑이 들어선다고 했다. 몇 년간 송전탑 건설을 막느라 할매들이 매일 새벽 산에 오르고 그 먼 서울을 자기 집 드나들 듯 오간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저 가끔 큰 행사에 참석할 뿐이었다. 양돈 사업이 집을 비우기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거니와 아버지는 송전탑이 농장에서 그렇게 가까운 곳에 들어서는지 알지 못했다. 작년 11월, 아들이 보내준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집에 찾아온 한국전력 직원에게 송전탑이 어디쯤에 들어서는지 물었다. 직원은 “농장에서 200미터 거리”라고 답했다.

그날부터였다. 아버지는 매일 집회에 참석했다. 거의 매일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왔고 괴로워했다. 그렇게 한 달여를 보낸 뒤인 작년 12월 2일, 아버지는 제초제를 마셨다.

가족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아버지는 4일 뒤인 12월 6일 새벽, 고통 속에서 이 땅을 떠났다. 사망 다음 날인 7일 밀양 경찰은 유한숙 씨의 죽음이 “음주, 가정불화, 돼지 값 하락에 의한 가계 부채 등 복합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경찰은 “고인의 사망이 지역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수단으로 호도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유족은 지금까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아니, 치를 수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을 욕되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고인의 첫째 아들 유동환 씨는 지난 4일 서울을 향했다. 매일 아침 한국전력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오후에는 청와대, 국회, 경찰청 등 정부 기관에 항의 방문과 면담을 하러 간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00일째가 되는 3월 14일까지 계속할 예정이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이 ‘공적인 죽음’이라는 걸 알리고 싶다”고 했다.

“경찰이 발표한 ‘복합적인 원인’ 중에 단 하나라도 맞는 이야기가 있으면 인정할 텐데, 완전 사실무근이에요. 아버지의 죽음을 왜곡하고 명예를 훼손했죠. 다음날 반박 기자회견을 해서 조목조목 이야기했어요. 부채도 없고 저희 집 화목했어요.”

▲ 유동환 씨는 아버지 유한숙 씨의 죽음이 ‘765㎸ 송전탑과 관련된 공적인 죽음’이라고 말했다. ⓒ문양효숙 기자

다부진 체격과 단단한 눈빛의 유동환 씨는 병원에 달려간 날, 자신과 여동생, 그리고 병원 관계자들 앞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을 한 글자도 빠트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병원에서 초동 수사를 나온 경찰이 ‘어르신, 왜 그러셨습니까?’ 하고 묻자 아버지께서는 정좌하신 채로 ‘765 송전탑 때문에 살기 싫어서 약 먹고 죽으려 했다’고 또박또박 말씀하셨어요. 경찰은 그걸 자기 휴대전화로 녹음했고요.”

하지만 수사 결과 발표에는 이런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유족은 음성 파일 공개를 요구했지만 경찰은 이를 거부했다. 지난 7일, 민주당 장하나 의원은 경남지방경찰청 측에 수사자료 공개를 요구했다. 수사자료는 수사 종료 후 유족의 동의만 있으면 언제든 공개할 수 있다.

동환 씨는 “8년째 진행돼온 국책사업이 어떻게 작년 11월에야 해당 가구에 일방적인 통보가 될 수 있는지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제가 원래 알고 있는 예정선로는 가르멜 수녀원과 저희 농장 중앙을 가르면서 지나갑니다. 800~900미터 되는 상당한 거리죠. 추측하건대 예정선로가 변경된 게 아닌가 합니다. 거리가 얼마 만큼인가는 이제 무의미해요. 송전탑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면 처음부터 주민들과 명확하고 투명하게 ‘여기 여기에 세워진다. 어느 정도의 피해가 예상되고 보상은 이렇게 될 것이다’ 알려주었어야지요. 그런 과정 전혀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시골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냥 괜찮다 괜찮다 무마하면서 공사를 강행한 거예요. 너무나 불합리해요.”

동환 씨는 ‘송주법’ 이야기를 꺼냈다. 송주법은 ‘송 · 변전설비 주변지역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로 지난 연말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률에 의하면 765㎸ 송전선로의 경우 송전선로에서 좌우 180m 이내의 주택과 33m 이내의 축사, 농지 등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법이 국회를 통과할 당시 보상의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최근 밝혀진 한전 측 보고서에 의하면 송전선로 경과지인 밀양시 4개 면 7,800여 가구 중 주택 보상을 받는 것은 0.39%인 31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고(故) 유한숙 씨의 집과 농장도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낙망하셨어요. 큰 충격이잖아요. 보상도 못 받는데 엄청 가까운 거리에 들어선다고 하고. 그 정도 거리면 돼지를 키울 수 없다는 거거든요. 송전탑 근처 가축이 사산, 유산을 하고 수정 자체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오셨어요. 예전부터 괴로워하셨죠. 그런데 그렇게 가까운 줄은 모르셨던 거예요.”

▲ 11일 오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유동환 씨(왼쪽 둘째)가 피켓을 들고 서 있다. ⓒ문양효숙 기자

동환 씨는 밀양에 살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송전탑 문제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유한숙 씨는 “아버지가 갈 테니 너는 오지 마라”며 송전탑 건설 반대 집회에 아들이 참가하는 것을 만류했다. 작은 마을에서 혹시나 자식의 앞길에 방해가 될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강남 한복판 한국전력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피켓을 든다. 경찰도, 한국전력도, 지방자치단체도, 국회도 “아무리 말해도 묵묵부답”이라 했다. 몸과 마음의 곤함을 감추지 않았다.

“몸도 힘들지만 피케팅하다 보면 뭐랄까 상실감 같은 게 느껴져요. 말로 잘 표현이 안 되네요. 계속 묻게 돼요. ‘아버지, 왜 그러셨어요?’ 하고. 정말 강인한 분이셨거든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점심시간이 되자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와 피켓을 들고 있는 유동환 씨 앞을 무심히 지나쳤다. 동환 씨는 무관심한 도시 사람들도 “송전탑이 나랑 전혀 상관없는 거라 여기지 말고 문제를 인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765㎸ 송전탑이 서울 한복판에 생길 리는 없겠죠. 하지만 유사한 엄청난 재난이 생길 수도 있어요. 아픔은 똑같을 거예요.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전기 때문에 먼 시골에 피해가 있다는 것, 국가 시책이 잘못되었다는 것만은 알았으면 좋겠어요.”

동환 씨는 “경제적인 논리보다 국민의 괴로움과 억울함이 더 중요한 거 아닌가” 되물었다.

“전기 생산하는데 원자력을 쓰면 비용이 적게 든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제 살만 하잖아요. 돈 더 벌지 않아도 된다고요. 전기 더 많이 생산해서 결국 대기업이 쓰잖아요. 전화기 더 팔고 자동차 더 팔아서 결국 대기업 배만 불리는 거죠. 대기업들은 가져가서 나누려고 하지도 않잖아요. 오히려 돈을 들여서라도 국민이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밀양 사람들은 그냥 농사지어서 안분지족하는 게 행복이에요. 국가가 그런 사람들의 행복을 빼앗으면 안 되는 거죠.”

동환 씨의 ‘상경 투쟁’은 14일 대한문 앞에서 고인이 돌아가신 지 100일을 맞는 추모 문화제까지 열흘간이다. 하지만 동환 씨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싸울 생각이다. 그에게 일차적인 문제 해결은 아버지의 죽음이 765㎸ 송전탑과 관련된 공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밝히고 이를 은폐, 왜곡하려 했던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유동환 씨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자 했다. 그는 “미력하나마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을 하는 게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길인 듯하다”고 말했다.

▲ 11일 광화문광장에서 녹색당원이 유동환 씨와 함께 유한숙 씨 죽음의 책임을 묻는 일인시위를 하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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