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66

55 또 거기에는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시중들며 따라온 여자들이었다. 56 그 중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있었고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마태 27,55-56)

▲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1520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증인은 오직 여인들뿐이다. 마르코나 마태오는 똑같이 그렇게 보도한다. 마태오는 십자가 처형 직전에 예수의 적대자들만 언급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여자 제자들은 멀리서 예수를 따라온 것 같다. 이 자리에 있어야 마땅할 12명 남자 제자들은 모두 스승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여인들은 로마 군인들이 두려워 “멀리서” 바라본 것일까. 예수를 멀리서 뒤따른 베드로(마태 26,58)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마태오가 그렇게 표현했을까. 우리는 알기 어렵다.

시중들며 따라온 여인들은 예수의 경제적 후원자라는 뜻이다. 여인들이 자기 재산을 바쳐 예수를 도운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런 내용을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전에 전혀 소개하지 않았다.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에 드는 비용을 예수가 어떻게 꾸렸는지 성서는 말이 없다.

그 여인들 중에 특별히 세 여인의 이름이 본문에 나타난다. 첫 번째 소개된 마리아 막달레나는 4복음서에서 중요한 인물로 언급되었다. 그녀는 귀신에게서 해방되었고(루카 8,2), 부활한 예수는 그녀에게 나타났다(요한 20,11-18).

두 번째로 언급된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는 형제를 둔(마태 13,55)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마리아 막달레나보다 먼저 말해지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어머니일까(마태 10,3)? 우리는 알 수 없다.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는 당시 마태오 복음서 독자들에게 알려진 여인 같다.

세 번째로 언급된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마르코 복음서 15,40에서는 살로메로 나왔었다. 왜 이름이 바뀌었는지 수수께끼다. 두 아들을 예수에게 인사 청탁하던 그 여인(마태 20,20)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마태오가 언급하였나. 알 수 없다.

예수를 도우며 따라다닌 여인들은 오늘날 신학에서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식탁에서 시중드는(diakoneo)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기는 하다. 여성은 3K〔Kinder(자녀), Kueche(부엌), Kirche(교회)〕 역할에 전념하라고 강조한 히틀러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서 20,26-28을 생각하여 복음에 대한 봉사에서 남녀의 평등한 역할을 보는 여성신학자들도 있다. 이 의견을 나는 이해하고 지지한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중세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네 가지 장면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일곱 마귀가 나간(루카 8,2), 그리고 부활한 예수가 나타남(요한 20,11-18), 죄 많은, 그러나 예수에게 용서받음(루카 7,36-50), 라자로의 누이로 예수께 기름 부은 여인(요한 12,3-8). 이 네 장면은 서로 뒤섞여서 그리스도교 신심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배경에서 그녀는 주로 죄지은 여인으로 여겨졌다. 그녀를 예수의 동지이자 연인으로 보는 시각도 드물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 제자의 대표 베드로에게 맞서는 여자 제자의 원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19세기 이후 문학작품에서 결혼한 예수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 카잔차키스처럼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의 동지이자 아내로 그리기도 하였다. 평등하고 자립적인 여인으로 묘사된 루이제 린저의 소설 <미리암>이 성서의 모습과 비교적 가깝고 인상적이라고 나는 느낀다.

인류 역사에 나타난 종교 중에 예수처럼 제자들에게 비참하게 버림받은 스승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스승으로 모신다고 말하지만 예수는 여전히 배신당하고 있다. 그래도 충실한 여자 제자들 덕분에 열두 남자 제자들에 대한 독자들의 실망이 조금 줄어들게 되었다. 남자 종교 지배층의 잘못은 여자 신도들의 헌신으로 조금 가려지는 것일까. 예수 곁에 남아있던 여자 제자들에게서 여성신학은 신앙의 계기를 찾았다. 초대교회에서 베드로보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역할을 더 강조하려 애쓰는 학자들도 있다.

남자 제자들의 처신에 대한 마태오의 비판이 본문에 담겨 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것은 제자들의 도리가 아니다. 고통의 현장에 없는 종교지도자는 지도자라고 말할 수도 없다. 가난한 사람을 편들지 않는 종교인은 아직 종교인이 아니다.

세상 종말이 곧 오리라는 분위기에 살던 마태오에게 남녀평등 문제를 차분히 다룰 여유는 없었다. 여자 제자들을 마치 짤막한 부록처럼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쳐 버리는 모습이 복음서에 보인다. 남자 제자들에 비해 성서 저자들에게 푸대접을 받은 셈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살던 성서 저자들이 오늘 여성신학자들처럼 고학력자는 아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여성의 평등 문제는 우리 시대에 본격적으로 다룰 주제다. 여성사제에 대한 교황 프란치스코의 생각은 깊지 않은 것 같다. 미래의 여자 교황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자신의 이름으로 선택할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교는 여성 신도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그리스도교는 살 수 있다. 전체 신도의 1%도 안 되는 남자 성직자들이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회개해야 한다. 인류 역사에 비하면 그리스도교는 바로 엊그제 출현한 셈이다. 미래를 생각하면 겨우 2000년 역사의 그리스도교는 이제 겨우 초보단계에 접어들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은 오직 여인이라는 것을 성서는 강조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장면에서 남자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장면을 남자들이 장악하지만, 성서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중요한 국면에 오직 여인들만 등장한다. 인류는 여성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인류의 희망은, <파우스트>에서 괴테의 선언처럼, 여성에게서 온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인간이라면 깊이 새길 말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이 있으며, 마태오 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 : 불의에 저항한 예수>가 최근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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