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27]

논어 술이편 제16장에 보면 묘한 수수께끼 하나가 제기되어 있다. 제기만 되어 있을 뿐 답은 주어져 있지 않다. 답도 단답형으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슨 수학의 공리 증명처럼 어떤 천재가 어느 순간에 드디어 답을 찾았노라고 선언할 만한 그런 수수께끼도 아니다. 그러니 구태여 말하자면 까마득한 미래를 향해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수수께끼인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수수께끼라고 여기지 않고 무심히 읽어 넘기곤 하는 그 문제의 단편은 다음과 같다.

염유(冉有)가 말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위나라 임금을 도와주실까?”
자공(子貢)이 말하였다.
“그래, 내가 여쭈어 보지.”
자공이 들어가 물었다.
“백이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옛 현인이다.”
자공이 말하였다.
“원망하였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짊을 구해서 어짊을 얻었는데 또 무엇을 원망했겠느냐?”
자공이 나와서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도와주지 않으실 것이네.”
冉有曰; 夫子爲衛君乎? 子貢曰; 諾, 吾將問之. 入曰; 伯夷叔齊何人也? 曰; 古之賢人也. 曰; 怨乎?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 出曰; 夫子不爲也.

얼핏 보면 무슨 선사들의 선문답 같아 보인다. 수수께끼는 결국 자공이 왜 공자와 두어 마디 얘기를 주고받은 후 “선생님께서는 도와주지 않으실 것이네”라는 결론을 내렸을까 하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바로 자공이었을 것이다. 자공은 이 에피소드를 기록하면서 자신이 수수께끼를 낸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후대의 독자들로 하여금 이 단편을 읽고 내가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생각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후대의 독자인 우리들은 수수께끼를 맞혀야 할 의무가 있지 않겠는가?

수수께끼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 대화를 둘러싼 몇 가지 사전 정보가 필요하다. 우선 이 대화는 B.C. 479년 정월과 4월 사이에 있었던 실제 대화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이 대화에 등장하는 위(衛)나라 임금은 출공(出公)으로 그는 정변(政變)을 당해 아버지 괴외(蒯聵)에게 임금의 자리를 빼앗기고 노나라로 망명을 왔다. <春秋>는 그 정변과 망명의 시점이 B.C. 479년 정월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 <春秋>는 같은 해 4월 공자의 사망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대화는 공자의 최만년에 있었던 대화인 셈이다. 제자 염유는 44세였고 자공은 42세였다. 당시 염유는 노나라의 실권자 계강자(季康子)의 가재(家宰)였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공자가 출공의 복위를 도와줄 의향이 있는지 여부는 계강자를 보필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정보였을 것이다.

출공이 노나라로 망명을 오게 된 사정은 다소 복잡하다. 우선 출공에 앞서 위나라의 임금을 하던 사람은 출공의 할아버지 영공(靈公)이었다. 영공은 우매한 임금이었는데 송(宋)나라의 여자 남자(南子)를 데려와 부인으로 삼았다. 그런데 남자가 송나라에 있을 때 관계를 맺고 있던 저 유명한 미남 송조(宋朝)를 못내 그리워하자 영공은 남자를 위해 송조를 노나라로 데려온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조치였다. 괴이하고 수치스러운 소문이 퍼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공의 아들 괴외(蒯聵)는 이 소문을 부끄러워하여 남자를 제거하려는 결심을 한다. 그러나 공모자의 배신으로 거사 계획은 실패하고 괴외는 송(宋)나라로 망명을 한다. 3년 후 영공이 죽자 위나라는 부득이 괴외의 아들 첩(輒)을 임금으로 옹립한다. 그가 바로 출공(出公)이다. 괴외는 진(晉)나라로 옮겨가 아들에게로 돌아간 군위를 호시탐탐 노린다. 그 후 12년이라는 세월이 더 흐른 후 괴외는 진나라에서 몰래 위나라로 잠입해 들어가 일당과 함께 정변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아들 출공을 쫓아내고 자신이 즉위하니 그가 장공(莊公)이다. 이 정변의 와중에 마침 위나라에 와 있던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출공의 지지세력이던 대부 공회(孔悝)를 돕다가 죽는다.

출공이 노나라로 망명을 왔다는 것은 장차 노나라의 힘을 빌어 복위하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복위를 도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노나라의 실권자였던 계강자의 몫이었지만 계강자가 뜻을 정하는 데에는 가재인 염유와 그의 스승이자 국로(國老)의 역할을 하던 공자의 의중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자공이 물은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백이숙제는 공자의 시대보다 500여년 앞선 은(殷)나라 말기,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들이었다. 일찍이 아버지가 죽으며 숙제에게 양위할 뜻을 비쳤다. 그러나 숙제는 형을 두고 임금이 될 수 없다고 사양하였고 형 백이는 아버지의 유언이 있는데 자신이 임금이 될 수 없다고 사양하여 결국 둘 다 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늘그막에 둘은 주나라의 서백(西伯 : 훗날의 문왕)이 노인을 잘 돌본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팡이를 짚고 서백을 찾아 길을 떠났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서백은 죽고 그의 아들 발(發 : 훗날의 무왕)이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은나라의 폭군 주(紂)를 치러 가고 있었다. 백이숙제는 이 정벌대를 만나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신하로서 왕을 치는 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만류하지만 결국 무왕은 주를 쳐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건설한다. 이에 백이숙제는 주나라에서 나는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먹다가 굶어죽었다. 이들의 이름은 대대로 어진 선비의 대명사처럼 전승되었다.

이것이 참고할 수 있는 모든 정황이다. 자, 왜 자공은 공자와의 짧은 대화 후, 염유에게 “선생님은 도와주지 않으실 것이네” 하고 단정하였을까?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우선 가장 권위 있는 해설자 주자(朱子)는 뭐라 하였던지 알아보자. 그는 백이와 숙제는 서로 나라를 양보하였는데 출공은 나라를 차지하고 아버지를 막았다(據國拒父)고 비난하며 그런 출공을 공자가 도와줄 리가 있겠느냐고 했다. 소소한 차이가 있으나 후대의 모든 해설자들은 이 해설을 따르는 데에 거의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적용된 논리도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다. 자공은 공자에게 질문할 때 질문 의도를 밝히지 않았다. 공자는 자신이 위나라 임금을 도울지 여부를 알기 위해 그가 물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백이숙제가 원망하였느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그 질문이 당연히 무왕의 은 정벌 강행을 겨냥한 질문으로 알았을 것이다. 형제가 서로 나라를 양보한 일화는 백이숙제 일화의 주된 일화가 아니었고 단지 사소한 배경 이야기에 불과했다. 자공도 “원망하였습니까?” 하고 질문한 것은 역시 수양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죽은 주된 일화를 두고 한 질문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주자뿐만 아니라 고주(古注)의 공안국(孔安國), 정현(鄭玄) 등도 모두 착각을 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주자의 잘못은 마치 출공이 임금 자리에 연연하여 아버지와 구차한 경쟁이라도 한 것처럼 정변을 바라본 점이다. 출공이 임금이 된 것은 당시 사정상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된 것일 뿐이다. 괴외는 망명 중이었고 남자가 권력을 쥐고 있는 한 위나라로 돌아올 처지가 못 되었다. 주자를 비롯한 모든 역대 해설자들은 이 단편의 해석을 꿰맞추기 위해 정치적 상황마저 왜곡하였던 셈이다.

실제 사실로 돌아가 보면 공자학단은 괴외에 의한 정변을 절대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자로가 다소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기는 했지만 괴외를 보는 앞에서 대놓고 비판했던 것은 바로 공자학단의 입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점에서 정약용이 마치 공자와 자로가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강변하며 자로를 비판한 것은 정조 임금과 사도세자와의 관계를 지나치게 고려한 특수 사정이 반영된 결과였을 것이다.

이제 백이숙제를 언급한 이유가 무왕의 은 정벌을 비판하며 굶어죽은 주된 일화와 관련된 것이라면 수수께끼는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2500년 동안 헛다리를 짚으며 사실상 방치되어온 이 수수께끼에 우리는 답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모든 논어 독자들이 이 수수께끼에 다가가기 위한 진지한 숙고가 있기를 바란다. 그 과정은 온전히 논어 전체에 걸쳐 공자가 깔아놓은 사유의 전체 구도를 투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공자 사유의 어떤 궁극적 지경에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공은 그의 특이한 직관력으로 그것을 알았던 것 같다.

나는 이 수수께끼에 대해 내 나름의 접근을 시도해 보았지만 답을 찾는 데는 실패하였다. 다만 주자를 위시한 모든 해설가들처럼 적어도 백이숙제를 언급한 것이 그들이 나라를 서로 양보한 것과 관련된 것은 아님을 밝힌 것처럼, 터무니없는 빗나감을 막고 나름대로 답이 드러날 수 있는 위치를 좀 더 압축해보았을 뿐이다. 그런 흔적으로 조만간 출간될 <새번역 논어> 개정판에 수록된 관련 단편의 주석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자는 인자(仁者)의 기본은 스스로 어질고자 함(欲仁)에 그치는 것이지 남을 원망하는 것이 아님을 평소에도 강조했다. 만약 원망하게 되면 스스로 사태에 개입하여 그 결과를 뒤집으려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 대화 당시 이미 그 사태에 개입하여 죽은 자로(子路)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이에 자공은 ‘求仁而得仁, 又何怨’이라는 공자의 대답에서 출공과 관련된 사태를 되돌려 놓는 일(출공의 복위)에까지 개입하지는 않을 것임을 감지한 것 같다. 이 부분을 이해하는 데에는 14/38에서 자로를 참소한 공백료(公伯寮)에 대하여 자복경백(子服景伯)이 흥분하여 그를 죽이려 했을 때 공자가 도가 행해지고 폐하는 것이 모두 명(命)이라며 만류한 것과 통하는 바가 있다. 두 사례를 깊이 고구하면 자공이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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