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겨울왕국>, 크리스 벅 · 제니퍼 리 감독, 2013년작

▲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겨울왕국>(Frozen, 2013)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겨울왕국>(Frozen, 2013)은 국내 개봉 애니메이션 사상 유례없는 천만 관객 돌파를 해냈다. 놀라운 흥행이다. 방학용 어린이 영화 정도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실은 어른들도 많이 봤다는 뜻이다. 실제로 30~40대 여성 관객들이 흥행을 이끌었다고 한다. 엄마들의 흔한 애니메이션 관람법은, 아이를 극장에 들여보내고 두어 시간 동안 다른 볼일을 보거나 다른 영화를 보는 식이다. 대개의 애니메이션은 부모가 함께 보고 싶어 할 만큼 매력적이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겨울왕국>은 반응이 달랐다. 어른들이 더 열광했다. 아이를 떼어놓고 일부러라도 가서 보는 식이었다. 주말 흥행에서 1위를 굳게 지킨 것은 가족 동반과 재관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겨울왕국>이 일으킨 화제는 지난 겨울 내내 문화계 전반을 휩쓸고 이끌다시피 했다. 단순한 흥행이 아니었다. 통상 방학을 겨냥한 애니메이션들이 제법 인기를 끄는 건 흔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남녀노소 모두를 감동시켰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지금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제시한 셈이 됐다.

이번 아카데미 주제가상까지 거머쥔 ‘렛잇고(Let it go)’의 위력은 대단했다. 영화에 들어 있던 음악들은 국내 각종 음원 · 음반 차트를 석권하며 독식하다시피 했다. 어린이들부터 어른까지 흥얼거리는 건 물론이고, 국내 가수들이 ‘렛잇고’를 속속 다시 부르는 기현상까지 생겨났다. 디즈니 왕국의 건재를 알리듯 전세계적인 흥행으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겨우내 국내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겨울왕국>과 관련된 도서들이 순위를 지켰다. 영어 버전이나 스티커북 등을 포함해 베스트 10위 중 6권이나 되는 등 심한 싹쓸이였다. 취약한 우리 문화계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겨울왕국>이 관객의 마음속 깊숙한 곳의 어떤 열망을 건드렸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무엇이 우리를 얼게 했을까

뒤늦게 보았다. 주위 사람들이 주제곡 ‘렛잇고’를 흥얼거리며 핸드폰 관련 음악들로 다운받고, 라디오에서 연일 주제곡이 흘러나오고, 화제에 오르내리며 여느 영화와는 다른 반응을 보고 난 후에야 영화를 접했다. 그래서 더 생각이 많아졌다. 정말, 우리는 왜 이런 이야기에, 이 정도 이야기에 깊이 잠들어 있던 내면이 다 흔들릴 지경이 된 것일까.

<겨울왕국>을 본 많은 이들은 디즈니의 진화가 놀랍다고 한다. 90년 역사 내내 새로운 캐릭터와 이야기 방식을 제시해 오긴 했지만 <겨울왕국>에서 ‘공주의 진화’는 놀랍다고 한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늘 가장 보편적인 대중정서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반영해왔다. 언제부터인가 거의 세계적 보편성까지 획득해 천문학적 흥행수익을 이어갔다. 디즈니의 첫 장편 만화영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는 당시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 회사를 파산 직전까지 끌고 갔으나 결국 경이로운 흥행수익을 거두고 ‘디즈니 왕국’의 초석을 이루게 된다. 이후 오랫동안 승승장구하던 디즈니가 어느 순간부터 침체의 늪을 헤맬 때 <인어공주>(1989)가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백설공주>와 <인어공주> 사이엔 50여 년의 세월이 있다. 사악한 마법의 잠에 빠진 채 오직 왕자가 오기만 기다려야 했던 백설공주와 잠자는 공주는, 오랫동안 가정과 사회에서 수동적 태도로 지내야 했던 여성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예쁘고 착한 공주는 치렁치렁한 드레스가 규정한 공주다움 이외에는 꿈도 없다. 공주의 운명은 왕자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인어공주>는 전혀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알렸다. 안데르센의 원작 동화와는 해석을 달리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용감한 공주, 곧 신세대 여성상을 구현했다. 공주가 변하니 왕자는 물론, 주변 모든 캐릭터가 함께 변해야 했다. 한계도 크지만, 디즈니는 꾸준히 진화했다.

<겨울왕국>은 익숙하면서 낯설다. 두 주인공 엘사와 안나는 확실히 다른 디즈니 공주들과도 차별화된 매력이 있다. 쌍둥이처럼 친밀하게 자란 자매는, 그러나 공존할 수 없는 비극 앞에 놓인다.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언니 엘사의 통제 불능의 ‘마법’ 때문에 형벌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엘사는 철저한 은폐와 은둔의 골방생활을 혼자서 감내한다. 비밀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장갑을 끼고 스스로를 방에 가두는 것만이 동생과 주변 사람들을 지키는 방법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들 그렇게만 강요하니까. 동생 안나는 언니가 격리된 문 밖에서 슬퍼하며 덩달아 외로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모두 외롭다.

아마도 엘사와 안나는 한 데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되고 단절된, 말하자면 분열된 여성성의 상징처럼 보인다. 남들의 시선에 갇혀 스스로를 부정하는 잔혹한 시간을 ‘적응’이라 여기면서. 결과는 ‘사악하고 아름다운’ 얼음 왕국이다. 엘사가 ‘렛잇고’를 부르며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할 때, 세상은 남김없이 얼어버렸다. 엘사의 통제되고 금기시됐던 마법은 날개를 달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엘사 자신마저 얼음 궁전에 갇힌 접근 불가의 괴물로 만들고 말았다. 노래가 예찬했던 그 자유로움 또한 실은 자발적인 게 아니었다. 쫓겨나다시피 떠나야 했고, 타인의 도움으로만 ‘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진정한 사랑’이라는 목숨을 담보한 제약까지 달려 있는 것이었다.

통합하라, 본연의 온전함을 되찾을 때까지

동화 속의 ‘공주’란 어쩌면 온전한 심성을 지닌 한 사람으로서의 여성, 나아가 자유의지를 지닌 모든 인간에 대한 비유인지도 모른다. 공주의 특징은 태평성대에는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비겁하게 지내다가도 유사시에는 비장의 용기와 지혜가 샘솟는다는 점이다.

엘사와 안나, 둘 중 누가 옳으냐는 구분은 무의미하다. 둘은 하나이고 하나여야 한다. 엘사의 재주, 안나의 따뜻함과 의리와 용기가 한 사람 안에서 통합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바라는 온전함(wholeness)이기 때문이다. 자매가 우여곡절 끝에 서로를 진정한 사랑으로 껴안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얼려버리기만 하던 통제 불능의 마법은 비로소 꽃피는 세상을 위해 쓰이게 된다. 봄은 그렇게 온다. 안데르센 동화 <눈의 여왕>의 선악 구도와 시점을 완벽하게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시키면서, 현대인이 결핍으로 앓고 있는 고통의 근원을 드러냈다고나 할까.

자신이 얼어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우리에게, 엘사와 안나가 던지는 과제는 만만치 않다. 본연의 온전함을 되찾을 때까지 통합하라는 내면의 소리는 어쩌면 평생에 걸쳐 들려올 테니 말이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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