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63

39 지나가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40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하며 모욕하였다. 41 같은 모양으로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도 42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 저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래.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고말고. 43 저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또 제가 하느님의 아들입네 했으니 하느님이 원한다면 어디 살려보시라지” 하며 조롱하였다. 44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예수를 모욕하였다. (마태 27,39-44)

▲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1520년
오늘 본문을 쓰려면 어느 기자가 십자가 곁에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지켜보고 기록해야 할 것이다. 마태오는 예수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니 그렇게 했을 리 없다. 마르코나 마태오에게 그런 자료를 전하고 건네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본문에 언급된 사람들이 그렇게 했을까? 십자가 곁에 있었다는 여인들일까? 예수를 지키던 군인들이 그랬을까? 복음서 저자들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어떤 의도에서 쓴 것일까? 종교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사형장을 행인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정말 지나갔을까?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은 그 고통 중에 예수를 빈정댈 기력이나 여유는 있었을까?

마태오는 예수를 조롱하는 세 무리를 등장시킨다. 그들이 예수를 조롱하는 데 쓰인 그리스어 동사는 각각 다르다. 공동성서(구약성서)가 여러 차례 인용되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스스로 구해보라’, ‘하느님의 아들’이란 단어가 각각 두 번씩 나타났다. 40절 첫 번째 모욕은 유대교 재판에서 나온 심문(마태 26,61.63), 42절 두 번째 모욕은 로마 재판에서 나온 심문 내용을 반영하였다(마태 27,11). 두 번째 모욕 장면이 가장 길게 보도되었고 내용상 가장 중요하다. 요한 복음에는 이 장면이 없다. 빌라도 측 사람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Blasphemein은 나쁜 말을 하다는 뜻이다. 머리를 흔드는 동작은 경멸의 표시로 널리 알려졌다(70인역 시편 21,8; 109,25; 이사 37,22). “지나가는 길손이 모두들 너를 보고 손가락질한다. 수도 예루살렘을 보고 머리를 저으며 빈정거린다. 천하일색이라 칭송이 자자하던 네가 고작 이 꼴이냐”(애가 2,15). 미사가 봉헌되는 강정마을이나 대한문 앞을 지나가는 일부 행인들이 수군대는 모습이 떠오른다.

40절 “네 목숨이나 건져라”는 말은 사막에서 악마가 예수를 유혹한 두 번째 요구 중 하나와 비슷하다(마태 4,5-6). 악마는 빵(돈), 능력(종교권력), 힘(정치권력), 세 가지로 예수를 유혹하였다. 그리스도교가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 세 가지를 마태오가 기록한 것이다.

하느님이 의로운 자를 마지막 순간에 살리실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시편 22,9; 지혜 2,17-20).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말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에게 하는 마지막 표징 요구였다. 로마 군대에 빌붙어 호사를 누리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조건부로 예수를 믿겠다고 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예수를 믿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왕은 카이사르(로마 황제) 밖에는 없습니다”(요한 19,15)라며 유대교 대사제들은 외쳤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로마를 신주단지 모시듯 사는 그들은 이미 모순에 빠졌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돈, 권위, 힘에 의지하며 사는 종교인들은 이미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이다.

44절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통 받는 사람들 사이의 분열을 드러내기 위해 마태오가 그렇게 쓴 것은 아니다. 예수가 죽음 장면에서 완벽히 홀로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예수는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고 하느님과 일치하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다른 사형수들이 정말로 예수를 빈정댔는지 의문스럽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말 한마디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럽다. 출혈이 심하고 못 박힌 몸이 아래로 흘려내려 사지가 찢어지고 정신이 혼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본문은 성서 해석 역사에서 거의 주목되지 않았다. 예수의 인내심이 강조되는 정도로 해설되었다. 카잔차키스는 소설 <최후의 유혹>에서 오늘의 본문보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46)를 더 주목하였다.

그런데 41-43절에 언급된 유대교 지배세력의 이야기는 유대교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적개심에 불을 질렀다. 마태오는 그런 효과를 노리지 않았지만 그런 부작용이 그리스도교 역사에 생겨났다. 마태오는 그저 유대교와 초대교회가 분열된 아픔을 내용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세 무리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반성하는 것이 더 좋겠다.

오늘의 본문에서 무엇을 배울까. 첫째, 예수는 역사의 희생자들과 고통을 함께한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는 예수의 모습에서 무능한 예수를 연상할 필요는 없다. 둘째, 악의 세력은 예수의 능력을 시험하고 그리스도교를 유혹한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악의 세력은 지금도 예수와 그리스도교를 계속 빈정대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리스도교는 빵으로 살고 힘으로 살고 권위로 살려고 애쓸 수도 있다. 특히 돈, 종교적 권위, 정치권력의 유혹을 언제나 받고 산다. 그런 유혹을 기다리기도 하고 실제로 유혹에 빠져서 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불의에 저항하며 순교로 산다. 예수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일각에서 유행하는 영광의 신학, 승리의 신학, 고통 받지 않는 예수의 모습 등은 오늘 본문의 내용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불의한 권력자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에서 안심할지 모르겠다. 예수라 해도 결국 비참한 죽음 아니던가. 그리스도교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그리스도교가 군대를 가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스도교에 국정원이 있는 것도 아니요, 댓글부대도 없고, 검찰도 경찰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기다려라.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정도가 아니고 부활이 있단다. 악의 세력은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악의 세력에게 빌붙는 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불의한 권력이 천년만년 가던가. 그렇게 날뛰어보아야 기다리는 것은 무덤이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생명을 빼앗을 권리도 가지셨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이 있으며, 마태오 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 : 불의에 저항한 예수>가 최근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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