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61

27 총독의 병사들이 예수를 총독 관저로 끌고 들어가서 전 부대원을 불러 모아 예수를 에워쌌다. 28 그리고 예수의 옷을 벗기고 대신 주홍색 옷을 입힌 뒤 29 가시로 왕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린 다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의 왕, 만세!’ 하고 떠들며 조롱하였다. 30 그리고 그에게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렸다. 31 이렇게 희롱하고 나서 그 겉옷을 벗기고 예수의 옷을 도로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마태 27,27-31)

유대 재판에서처럼 로마 재판도 예수에 대한 모욕과 조롱이 이어졌다. 예수를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과정에서 군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예수는 군인들 행동의 대상으로 등장할 뿐이다. 군인들의 대장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29절 조롱놀이를 중심으로 예수의 옷을 벗기고 왕의 옷을 입히고 다시 벗기는 장면이 앞뒤로 둘러싼다. 본문에서는 옷을 입힌 뒤에 예수를 때리지만 사실은 나체 상태에서 비로소 채찍질을 한다. 그래서 어떤 성서 사본에서는 “예수의 옷을 벗기고”라는 부분이 삭제되었다. 베드로 복음에도 오늘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수를 사형시킨 사람은 빌라도가 아니라 헤로데라고 기록하였다.

대사제 카야파의 심문에서 예수는 메시아라는 이유로 조롱받았다(마태 26,67). 빌라도의 심문에서 예수는 유다인의 왕이라고 조롱당한다. 빌라도의 재판에서 예수가 정치범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장소는 빌라도의 예루살렘 관저인 헤로데 언덕 마당이다. 군인들은 이스라엘에 사는 이방인 외인부대 용병이다. 유대인은 종교적 이유로 군 복무에서 면제되었다. 군단(legio)의 10분의 1인 부대(speira)는 약 600~1,000명으로 구성된 단위인데 과장된 숫자 같다. 이방인 군인들이 예수를 고문할 때 유대인에 대한 미움이 드러난다.

▲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는 그리스도>, 지오토, 1306년

왕을 나타내는 3가지 소품으로 예수는 장식되었다. 갈대는 왕의 지팡이를 감싸는 재료다. 이스라엘에는 십여 종의 갈대가 자라고 있었다. 가시관은 왕관을 모방한 것이다. 가시관은 후에 예수 추종자들이 순교할 때 쓰이던 도구이기도 하다.

예수에게 입혀진 주홍색 옷은 klamus라 불리는 남자용 상의로 짧은 길이의 겉옷이다. Chiton이라는 속옷 위에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로 걸쳐 내리는 사각형 또는 둥근 모양의 양털로 만든 옷이다(70인역 2마카 12,35). 왕이나 귀족뿐 아니라 군인과 가난한 사람들도 입던 옷이다. 자주색 옷(마르 15,17)은 왕만 입는 옷이다. 자주색은 사치스런 여인들 옷에 쓰이던 색깔이다(예레 4,30; 묵시 17,4; 18,16). 로마 군대의 붉은색 군복이 예수에게 입혀진 것 같다. 군복을 입고 난동을 부리는 어버이연합 어르신들과 사형 직전에 군복 입은 예수의 모습은 같지 않다.

땔감으로 쓰이던 가시로 엮은 왕관이 예수의 머리에 씌워졌다(즈카 6,11; 요한 19,2). 붉은 색 겉옷과 황금색 관은 그리스 영주들의 상징이었다(1마카 10,20). 갈대로 만든 지팡이는 왕이 사용하는 지팡이다. 그런 권력의 상징인 지팡이와 관을 왜 주교들이 미사에서 여전히 사용하는지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가톨릭 전례와 권력의 상징이 서로 무슨 관계가 있을까.

예수를 왕으로 꾸민 후 예수를 조롱하는 놀이가 시작된다. 유명한 사람을 흉내 내는 연극은 당시 널리 유행하였다. 유대 유력인사에 대한 이방인들의 경멸은 여러 차례 있었다. 44년에 이방인 군대가 죽은 왕 아그리파 1세와 그 딸을 모욕한 사건을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기록하였다. 왕에게 신하들이 하듯 군인들이 예수에게 무릎을 꿇는 시늉을 한다. “유다인의 왕, 만세!”는 로마 군인들이 황제에게 외치는 “황제 만세(Ave, Caesar)”를 닮았다.

침 뱉기는 경멸의 상징이다(민수 12,14; 신명 25,9). 왕의 상징으로 예수에게 주었던 갈대로 유대인의 왕 예수를 때린다.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고통 받는 하느님의 종을 연상케 한다. “나는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이사 50,6). 예수는 갈대를 연약함의 상징으로 말한 바 있다(마태 11,7; 12,20).

31절에서 조롱하는 놀이가 끝난 뒤 다시 예수의 옷을 입혀 사형장으로 끌고 갔다고 한다. 4복음서 모두 예수가 옷을 입은 채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보도한다. 그러나 사실은 벌거벗은 채로 끌려간 것 같다. 십자가에 처형될 때 죄수들은 나체 상태다. 남자들은 앞을 보고 매달리고 여자 죄수들은 등을 보인 채 매달린다.

가시관을 쓴 왕이라는 표현은 고대에 드물었다. 그러나 가시관을 쓴 예수는 초대교회에서 승리의 관을 쓴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모욕 받는 예수는 감추어진 신성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해설되었다. 중세 이후 고통 받는 예수의 모습이 다시 강조되어 오늘에 이른다. 개신교에서는 ‘우리를 위해’ 고통 받는 모습이 특히 강조되었다.

예수도 군인들에게 조롱당했다. 동족 유대인과 이방인 로마 군대에게 동시에 모욕당했다. 군인들에게 희롱당한 사람들이 역사에서 어디 한둘이랴.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 시절 군인들이 여기저기서 마구 설쳐댔다. 전두환 시절에 군인들이 절에 난입하여 스님들을 끌고 가 고문한 사건도 있었다.

정치권력은 종교를 언제나 희롱할 준비가 되어 있다. 돈과 특혜로 종교인을 유혹할 장치는 항상 마련해 놓는다. 부자들도 종교를 맘껏 희롱한다. 그런 희롱을 기쁘게 맞이하는 종교인도 적지 않다.

그것뿐 아니다. 그리스도교도 예수를 자주 조롱한다. 불의한 권력이나 부자들과 결탁하여 돈이나 특혜를 뜯어내는 수법은 그 예다. 예수를 팔아 자기 호주머니를 채우는 일은 예수를 희롱하는 짓이다. 가톨릭이 종교재판에서 희생자들을 고문하고 사형시킨 죄는 교황의 사과 선언 하나로 무마될 일이 아니다.

예수가 고문당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자세히 소개하는 본문은 사실 의외다. 십자가 처형 장면을 단 한 줄로 보도하는 모습(마태 27,35)과 대조적이다. 내 부모나 자녀가 고문당한다면 우리 심정이 어떨까. 예수의 고문당하는 모습을 보기란 슬픈 일이다. 칼뱅의 말처럼, 많은 말과 해설보다는 침묵 속에서 조용히 묵상하는 것이 더 나을 장면인지도 모르겠다.

역사의 희생자들이 겪는 고통을 함께 겪는 예수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위로를 받으리라. 예수처럼 고통을 겪는 특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이 선사하시는 특권이다. “불의에 저항하다가 받는 고난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내 스승 소브리노는 제주 강정마을에 대한 대담 중에 말했다.

한 가지 꼭 덧붙이고 싶다. 예수의 고통 받는 모습에서 예수의 저항하는 모습을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의에 대한 저항이 없는 고통은 맹목적이고 무의미하다. 그런 고통은 참을 필요도 없고 겪어서도 안 된다. 부패한 제도나 불의한 권력에서 오는 고통을 그저 참으라고 설교하는 것은 사기꾼들이나 하는 짓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이 있으며, 마태오 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 : 불의에 저항한 예수>가 최근 출간됐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