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60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시자 총독은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것은 당신 말입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12 그러나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고발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3 그래서 빌라도가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 죄목을 들어서 고발하고 있는데 그 말이 들리지 않느냐?” 하고 다시 물었지만 14 예수께서는 총독이 매우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5 명절이 되면 총독은 군중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16 마침 그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17 빌라도는 모여든 군중에게 “누구를 놓아주면 좋겠느냐? 바라빠라는 예수냐? 그리스도라는 예수냐?” 하고 물었다. 18 빌라도는 예수가 군중에게 끌려온 것이 그들의 시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19 빌라도가 재판을 하고 있을 때에 그의 아내가 전갈을 보내어 “당신은 그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간밤에 저는 그 사람의 일로 꿈자리가 몹시 사나왔습니다” 하고 당부하였다.

20 그동안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는 죽여 달라고 요구하게 하였다. 21 총독이 “이 두 사람 중에서 누구를 놓아달라는 말이냐?” 하고 묻자 그들은 “바라빠요” 하고 소리 질렀다. 22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예수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자 모두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소리 질렀다. 23 빌라도가 “도대체 그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으나 사람들은 더 악을 써가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24 빌라도는 그 이상 더 말해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기세가 보였으므로 물을 가져다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25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26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었다. (마태 27,11-26)

▲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세부, 렘브란트의 1634년 작품
예수에 대한 빌라도의 심문(11-14), 예수에 대한 빌라도의 사형 판결(15-26),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단락이다. 빌라도는 질문을 예수에게 두 번 하고 나머지는 군중에게 한다.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빌라도가 전혀 질문하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판사로 등장하는 빌라도가 방청객에 불과한 군중에게 사형 판결권을 떠맡기는 모양새는 어색하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범죄를 낳게 한 24-25절은 당시 실제로 일어난 사실은 아니고, 후에 마태오 공동체에서 꾸며진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정치범, 사형수들은 오늘의 본문을 떠올렸겠다.

등장인물도 많고 서로 대조되는 역할도 많고 긴장감이 넘치는 본문이다. 예수를 무죄한 사람으로 보는 빌라도의 아내, 예수를 죽이라고 선동하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나온다. 죽을 예수와 석방되는 바라빠, 서 있는 예수와 앉아 있는 빌라도가 있다. 군중을 가리키는 표현은 oklos(군중, 15), tous oklous(군중 복수명사, 20), pantes(모두, 22), pas ho laos(전체 군중, 25)으로 갈수록 확대된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왕이냐 묻더니(11), 군중들에게 그리스도라고 호칭한다(17.22). 예수와 군중이 맞서는 것이다.

대본인 마르코 복음서 15,2-15에 빌라도 아내의 꿈 이야기(19), 빌라도의 손 씻는 장면(24)을 마태오는 추가하였다. 빌라도 살리기에 마태오는 마르코보다 한술 더 뜨는 것이다. 유대인 죽이기는 더 강화되었다. 예수는 무죄한 사람(19)이란 표현은 마태오에서 여기에만, 그것도 예수를 사형 판결한 빌라도의 아내 입에서 나온다. 메시아를 죄 없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사례는 공동성서(구약성서)에는 없다.

재판이 공식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인상이 더욱 강조되었다. 본문의 주제는 세 가지다. 첫째, 예수는 죄 없이 처형되었다. 둘째, 예수는 정치범이었다. 셋째, 예수 죽음의 주범은 로마 군대요, 종범은 유대교 지배세력이다.

자기 땅에서 남의 나라 군인에게 예수는 재판받는다. 로마법에 따르면 피고는 판사 앞에 서 있고(사도 4,7; 24,20) 재판관은 앉는다. “유다인의 왕”은 이방인이 쓰는 표현이다.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왕’이란 표현을 쓴다(마태 27,42). 빌라도가 예수에게 ‘왕’이냐고 질문한 것은 정치적 의미의 왕이냐는 뜻이다. 종교적 의미의 왕 여부에 빌라도는 관심이 없다. 그런 질문은 유대교 종교재판에서나 다룰 문제다. 빌라도가 성서학자들처럼 예수에게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 말입니다”(su legeis, 마태 26,64)는 긍정의 뜻이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는 그렇다고 답하였다. 그닐카, 루츠 등 존중받는 성서학자 대부분이 그렇게 이해한다. 그런데 예수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고 설교에서 왜 그토록 강조들을 할까. 그 숨은 이유가 짐작은 간다.

12절에서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고발하는 말이 무엇인지 마태오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13절에서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 죄목을 들어서 고발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마태오는 역시 말이 없다. 낱낱이 소개해야 마땅하지만 너무나 허술한 마태오의 보도다. 로마 재판법에 따르면 피고는 반드시 발언해야 한다. 피고의 침묵은 죄목을 시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재판을 빌라도 혼자 진행했는지 여러 재판관이 함께 있었는지, 빌라도가 통역을 썼는지, 빌라도와 예수가 그리스어로 대화했는지 알 수 없다.

14절에서 예수의 침묵은 ‘하느님의 고난 받는 종’이라는 관점에서 서술되었다(이사 53,7; 시편 39,10). 15절에서 명절이 어느 명절을 가리키는지, 죄수를 석방하는 것이 관례였는지 알기 어렵다. 16절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라빠(barabbas)는 당시 흔한 이름이었다. episemos는 ‘유명하다’는 뜻인데 무슨 이유로 유명했는지 마태오는 설명하지 않는다. 마르코 복음서 15,7에는 로마 군대에 저항하다가 관계된 살인을 암시하는 것 같다.

17절 “바라빠라는 예수냐? 그리스도라는 예수냐?”에서 정치적 인물 바라빠와 종교적 인물 예수를 대비시키는 설교가 많았다. 소설에 불과한 설교겠다. 18절 “빌라도는 예수가 군중에게 끌려온 것이 그들의 시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에서 빌라도가 어떻게 알았는지 마태오는 말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남이 하면 그 사람을 칭찬하지만,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남이 하면 시기하는 버릇이 우리에게 있는가.

19절에서 빌라도의 아내와 빌라도가 나눈 이야기를 마태오가 어떻게 알았을까. 20절에서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군중을 선동하였다는 보도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군중은 그저 선동 당하는 존재인가. 정치권력자나 종교권력자들은 군중을 선동하려 애쓴단 말인가. 지나간 시대만의 일이 아니고 남의 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지금 한국에서 벌건 대낮에 신문과 방송과 종교 건물 안에서 버젓이 저질러지는 일이다. 예수의 잘못이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군중은 대답하지도 않고 그저 예수의 사형만 요구한다. 세상에 제일 무서운 죄는 헌법에도 없는 괘씸죄다.

25절에서 군중은 당시 재판정에 있던 군중을 가리키는가, 당시 생존하던 유대인 전체를 가리키는가.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는 laos와 단순히 군중을 뜻하는 oklos가 본문에서 같이 사용되어 성서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유대인 약 300만 명 중에 재판정에 있던 유대인은 높게 잡아도 3,000여 명이라고 유대인 저술가 라피데는 추측한다. 로마 재판은 공개재판이기에 야외에서 열리고 방청객이 있다. 예수를 사형시키라고 요구한 유대인은 유대인 총인구의 0.1%도 안 된다. 그들 때문에 당시 유대인이 비난받을 수도 없고 유대인 후손에게 책임을 물어서도 안 된다. 유대교에서 죄는 당사자 책임이지 유전된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빌라도의 아내는 곧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오리게네스는 그녀를 의롭고 거룩한 여인으로 묘사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남자를 죄로 유혹한 이브와 달리 남편을 구원으로 이끈 모범으로 여겼다. 24절 빌라도의 손 씻기는 빌라도 살리기의 극치다. 이방인 빌라도가 손 씻기라는 유대교 종교의식을 따를 리 없다.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손 씻기가 죄를 없애주는 역할로 인정되지도 않았다.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 하고 소리쳤다”(25)는 유대인 죽이기의 극치다. 24-25절은 로마 군대에게 잘 보이기, 유대인 미워하기가 초대교회의 생존전략이었기 때문에 생긴 구절이다. 이제나마 그런 배경과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었으니 그리스도교에도 얼마나 다행인가.

성서 저자들이 빌라도 살리기에 나섰다 하더라도 빌라도의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빌라도는 군중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예수를 무죄로 석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를 사형 판결하고서 손을 수천 번 씻어보아야 헛짓이다. 손을 씻어서 죄가 없어진다면 독재자들은 하루에도 수백 번 손을 씻겠다.

합법을 빙자한 손 씻기 수법이 우리 사회에서 날로 교묘해지고 있다. 히틀러의 통치행위는 모두 합법적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합법이면 곧 무죄’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합법적인 범죄가 세상에는 아주 많다. 그것을 깨우쳐주는 사람이 곧 예언자다. 의롭게 살고 생각하는 평범한 시민은 모두 예언자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이 있으며, 마태오 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 : 불의에 저항한 예수>가 최근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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