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37] 마태 16,13-23

“너는 행복하다! ……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이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7-18)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 16,23)

▲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시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20년
스승 예수님께서 같은 제자 베드로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한 것으로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반석’을 ‘걸림돌’이라고, ‘사탄’이라고 심하게 꾸짖었을까요?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변덕’을 부리셨을까요? 마태오 공동체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곧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한 자리에 모여 이 혼란스러운 예수님의 태도를 보이는 복음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물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고통을 밝히기 시작합니다(마태 16,21). 그러자 ‘반석’의 지위에 오른 베드로는 당연하다는 듯이 반박합니다. 복음은 베드로의 태도를 이렇게 생생하게 전합니다.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반박합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꼭 붙들고” 말입니다(16,22). 아마 예수님과 동행했던 다른 모든 제자들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마르코 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수식어가 없이 그냥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고만 대답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두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도 복음을 시작하면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1)이라고 선언하고,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현장에서 백인대장이라는 이방인의 입을 빌어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마르 15,39)고 말입니다.

입으로는 수없이 신앙을 고백하지만
실제로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 삶은 아닐까

우리라면 세상 권력(로마에 부역했던 헤로데와 지도자들, 그리고 로마의 총독 빌라도) 앞에서, 그리고 이중의 억압에 시달린 군중의 무력함 속에서 그렇게 맥없이 죽은,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젊은이의 죽음을 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메시아’라고, 그리고 그분이 ‘기쁜 소식’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자문하게 됩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당과 교회를 다니면서 하도 똑같은 말을 들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냥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적당한 ‘수식어’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수도 없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말하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는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관례적인 ‘수식어’로서 빈말이 아니라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의 궁핍을 덜어주도록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8항)는 보편교회의 고백은 점점 분명해지는 ‘현실’이 되거나, 적어도 희미하게라도 그 구체적 모습을 현실에서 드러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사회에서,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서 그 같은 모습을 얼마나 찾아볼 수 있습니까? 오히려 예수님께서 마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고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 예수님을 따른다는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드러내놓고 외면하고 무시하고 괄시하고 저주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오늘날 그 수많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처절한 몸짓과 절규가 곳곳에서 끊임없을 수 있겠습니까?

마태오 복음을 듣고 있던 당시의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우리처럼 그렇게 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하면서 몸으로는 전혀 다른 길을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 봅니다. 오히려 복음 말씀을 들으면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께서 행복하다 하고, 반석이라 하고, 그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고, 게다가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한 말씀을 듣고, 그 속에서 예수님의 짧지만 치열했던 생애를 성찰하며, 우리도 용기를 내어 그 길을 따라야 한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지 않았을까요? 즉 예수님처럼 교회도 세상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 그러니까 배고프고 목마르며, 헐벗고 떠돌아다니며, 감옥에 갇히고 병들어 누어있는 그 ‘가장 약한 사람’을 든든하고 안전하게 보호하고 보살피는 반석, 그런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다짐 말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여긴 행복은 오늘의 우리와 달리,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사실 복음은 곳곳에서 스승이 왜 그런 고초를 겪고 배척을 받아 죽었는지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대단한 분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동고동락했기 때문에 그리되셨음은 “들을 귀가 있고 볼 눈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은 이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한다”는 꾸짖음 말입니다. 그 꾸짖음은 베드로에게 한 것이지만, 복음을 듣고 있던 당대의 신자들은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다짐을 새롭게 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했던 스승 그리스도를 쫓아가야 한다는 다짐 말입니다. ‘사람의 일’이야말로 스승 그리스도께서 사탄으로부터 받은 유혹이었다는 깨달음을 잊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혹은 이미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복음사가는 이를 통렬하게 비판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또 어쩌면 이 같은 통렬한 비판에 대해 교회 내 주류 지도자들은 불쾌하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원로, 수석사제, 바리사이만을 위한 교회가 되지 않기를

세월이 훌쩍 지나 2000년대의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수도 없이 많아졌습니다. 그 가운데 당시의 수석사제 격인 분들도 많아졌으며, 당시의 원로 격인 분들도 많아졌습니다. 바리사이 같이 경건한 분들도 정말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교회는 반석 위에 세운 그리스도의 교회입니까? 가난하고 고통 받는 그리스도의 교회입니까? 혹시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을 위한 교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배고픈 사람들 더 배고프게 하는 능력, 목마른 사람에게서 한 방울의 마실 물마저 빼앗는 능력, 헐벗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추방하는 능력, 감옥에 더 많은 사람을 가두고 병든 사람을 내팽개치는 능력을 하늘나라의 열쇠라고 여기고, 그 열쇠를 갖게 해주신 하느님의 축복(?)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는 사람들을 위한 교회 말입니다. 또 이를 비판하고 ‘전환’, ‘개심’ 혹은 ‘쇄신’을 촉구하는 교회의 일부 구성원들을 두고 분열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혹은 시대착오적인 비판을 한다고, 혹은 아예 척결해야 한다고, 혹은 그렇게 하다가는 교회 내에서조차 발붙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야단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태오 공동체 신자들이나 마르코 공동체 신자들이나 오늘의 우리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지도 못했으며, 우리만큼이나 고통스럽게 현실을 뚫고 지내온,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한 자리에 모여 우리처럼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고 우리 교회는 지금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걸림돌’일까요? 아니면 ‘반석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일까요? 글을 시작하며 소개한 성경 말씀에서, 앞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동료이자 제자인 베드로를 ‘디딤돌’이라, 뒤의 말씀은 ‘걸림돌’이라 말씀하십니다. 같은 돌이 ‘디딤돌’이 될 수도 있고,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음은 우리도 잘 압니다. ‘디딤돌’은 도약의 토대가 되고, ‘걸림돌’은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이 땅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디딤돌’일 수도 ‘걸림돌’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의 역할, 그리스도인 공동체, 그리고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은 무겁습니다.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지만 ‘디딤돌’이 됩시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로, 예수님께서 당신 사랑으로, 성령께서 당신의 일치의 보살핌으로 우리를 이끄시니, 용기를 냅시다.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 (교회헌장 8항)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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