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 신부의 Spring Tree - 마지막 회]

나는 요즘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빠져서 인생의 여러 가지 맛을 느껴봅니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 게 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요한 3,8)

내 영혼이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도대체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 그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습니다.

‘인생은 하나의 연극 무대와 같다’고 한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내 인생은 하나의 연극 무대입니다. 하느님은 그 연극의 각본을 쓰신 분이십니다. 그는 전지전능한 창조력을 갖고 있어 모래알처럼 많은 이 지상의 모든 인간들에게 각각 그 인생에 합당한 희곡을 써 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 인생의 무대에 태어나는 한 그 누구의 배우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지상 수십억 사람들의 얼굴이 각각 서로 다르고, 개성을 지녀 독특한 것처럼 각자마다 지닌 극본의 내용도 단 한 가지의 대사도 중복되는 일 없이 다양하고 독창적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신비하고 놀라운 작품들입니다. 이 지상의 모든 꽃과 나무, 살아있는 생명에 하느님은 최고의 걸작들을 만들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땅 위에 구르는 하찮아 보이는 돌멩이 하나에도 하느님의 숨결이 들어 있습니다. 이름 없는 들꽃 한 송이에도 하느님의 사랑이 듬뿍 들어있고 하루를 살다 죽는 부나비에도 하느님의 작품임을 보증하는 하느님의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자제품에는 보증기간이 있습니다. 보통 1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작품임을 나타내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보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를 열고 듣습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우는 울음소리도, 돌 틈을 흘러내리는 시냇물 소리도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하소연의 목소리입니다. 달 밝은 밤 달을 보고 짖는 늑대의 울음소리도, 가을밤 풀잎에 숨어 우는 귀뚜라미 소리도, 봄이 되어 땅 속에서 쑥쑥 올라오는 쑥의 봄 인사도 모두 하느님을 향해 칭얼거리는 어리광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박홍기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마나셨는데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입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다.’” (요한 9,1-3)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예수의 설명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면 그를 불행한 소경으로 창조하셨을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눈으로, 이 세상의 가치 척도로 판단하면 불쌍하기 짝이 없는 눈먼 소경의 불행도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하나의 독창적인 걸작인 것입니다.

그 오묘하고 신비로운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같은 피조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뿐인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완전한 아버지께서 불완전한 자신의 피조물로서의 모상을 창조하실 리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모든 것이 온전하며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주님이 지은 세계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세계를 찾습니다.

시편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느님,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
하느님,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느님.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
언제나 임 계신 데 이르러
당신의 얼굴을 뵈오리이까?”

암사슴이 시냇물은 찾듯이 나의 몸도 애타게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도, 그 무서운 폭풍 소리도, 모래사장을 핥는 파도 소리도, 달을 보고 우는 늑대 소리도, 깊은 산골짜기에 홀로 피어났다 홀로 지는,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들꽃 하나도, 태어났을 때부터 불쌍한 소경도,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흙으로 하나의 인간을 만들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 영혼을 불어넣는 순간부터 하느님은 그 인간에게 맞는 대본(臺本)을 준비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상의 세계는 하느님의 대본을 따라 연기하며 살아가는 무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막이 열리는 것으로 우리의 인생은 시작되는 것이며 막이 내리면 우리의 연기도 끝이 납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자신의 욕심대로 사는 일에 몰두하여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거룩한 존재인가를 망각하고 제 몸 위에 죄를 짓고 살아갔습니다. 그것이 불쌍하여 하느님은 자신의 외아들을 이 지상의 배우로 보내셨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연기를 온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이 지상의 무대 위에서 스스로 십자가와 죽음으로 온전한 인생 무대의 연극을 완결시켜 주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말했다던,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 사실 가까이서 볼 때 비극인 삶이야말로 멀리서 볼 때 희극일 수 있습니다. 비극을 경험하지 못한 삶이야말로 멀리서 볼 때 진정으로 비극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삶은 비극과 희극을 가로지르는, 생의 의지로 충만하고 역동적 삶으로 하느님의 선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다만 우리는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고, 그 노력이 빛을 발할 것을 확신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기다릴 뿐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희극적인 순간을 위해 오랜 비극을 감내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는 분명 그의 비극적 삶이 희극으로 보이는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최민석 신부 (첼레스티노)
광주대교구 현애원 담당 사제

이번 회로 ‘최민석 신부의 Spring Tree’ 연재를 마칩니다. 복음과 생활을 연결하는 묵상 글을 제공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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