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26]

크릴(H. G. Creel)의 저서 <공자―인간과 신화(Confucius : the Man and the Myth)>는 우리나라에서 제법 많이 읽힌 책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책을 즐겨본 것은 주로 그 시각의 색다름 때문이었다. 크릴은 서양 사람이었기 때문에 무얼 봐도 자신의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의외로 참신하고 흥미로운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책을 본 사람 중에는 그가 청(淸)나라 때의 한 학자에게 유난히 찬사를 보내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로 최술(崔述)이라는 사람이다. 그가 최술을 높이 평가한 것은 바로 고증학자로서 최술이 가지고 있던 높은 과학정신 때문이었다. 최술은 청대를 휩쓴 고증학의 비판정신을 상고사(上古史), 특히 공자의 언행을 기록하고 있는 많은 문헌들에 적용하였다. <논어>는 물론, <좌전(左傳)>의 여러 기록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공자가어(孔子家語)>, <예기>, <공자연보>, <신서> 등등의 책이 모두 그의 꼼꼼한 문헌비판을 거쳐 그 신뢰성을 판정받아야 했다. 그의 유명한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은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최술은 공자를 둘러싼 수많은 기록 중에서 어떤 것을 믿을 수 있고 어떤 것을 믿을 수 없는지 치밀하게 판단하고 분류하였다. 이를테면 그는 <공자가어>에 대해 그 책 자체를 대부분 믿을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공자가어(孔子家語)>라는 책은 후인들이 거짓되이 엮은 책이다. 거기에 실린 글들은 모두 다른 책에서 따와서 늘리거나 줄이거나 고치거나 바꿔서 꾸민 것들이다. 이를테면 ‘상노(相魯)’편은 <좌전>과 <사기>에서 따왔고 ‘변물(辨物)’편은 <좌전>과 <국어>에서 따온 것이다. ‘애공문정(哀公問政)’과 ‘유행(儒行)’ 양편은 <예기> ‘곡례’에서 따온 것이다. ‘자공(子貢), 자하(子夏), 공서적문(公西赤問)’편 등은 <예기>와 <좌전>에서 따온 것이다. 심지어 <장자>, <열자>, <설원>, 각종 참위서 등 따오지 않은 곳이 없다. 어느 한편도 베끼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베낀 것과 원본을 또 비교해보면 늘이고 줄이고 고치고 바꾼 것이 원본보다 자질구레하고 문장도 천박하고 너절하다. 결국 원본만 못하여 더러는 그 본래의 취지를 잃기도 했다. 표절한 것이 분명하여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세상은 살피지 못하고 그것을 공씨 가문의 남긴 글이라 여기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뿐만 아니라 사마천(司馬遷)과 <사기>의 권위로 인하여 폭넓게 인정되던 ‘공자세가’마저도 그 안에 신뢰할만한 자료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과감하게 천명하였다. 그런 것들이 혼탁한 자료들 앞에서 답답해하던 크릴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동벽(東壁) 최술(崔述)은 1740년에 태어나 1816년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기적으로는 청나라가 가장 강대하고 소위 문예부흥기라 불릴 정도로 문화가 융성하던 시대였다. 그는 한평생을 매우 청빈하게 살았다. 어렸을 적에는 몇 차례의 홍수로 거처를 잃기도 하는 등 어려움이 겹쳤다. 그러다가 15살 나던 해에 동자시(童子試)를 보러 북경에 왔다가 대명부(大名府) 지부(知府) 주영(朱煐)의 눈에 들어 그의 아들과 함께 대명부 만향당에서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거기서 그는 세상의 귀중한 책들을 마음껏 보고 천하의 인재들과 교유하며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키워갈 수 있었다. 8년 후 자신을 돌보아주던 주영이 은퇴하여 고향 운남(雲南)으로 돌아가고 그는 북경에 남아 객사에서 초라하게 살며 공부를 계속하였다.

한편 은퇴한 주영은 고향에서 진리화(陳履和, 1761~1825)라는 한 어린 제자에게 최술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준다. 진리화는 자신보다 21살 위의 이 최술이라는 사람을 만나보려는 오랜 꿈을 키우게 된다. 세월이 지나고 1792년 삼십 초반의 진리화는 북경에 가서 오십 초반의 최술을 수소문하여 만나게 된다. 거기서 진리화는 달포에 걸쳐 최술이 저술한 많은 초고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게 된다. 진리화는 최술에게 간청을 거듭하여 그의 제자가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임무는 바로 스승의 저술을 세상에 전파하는 일이라고 믿고 그 중 일부를 필사한다. 약 두 달간에 걸친 이 만남은 그들의 실제 만남의 전부였다.

최술은 저술과 보완 작업을 계속했고 진리화는 운남에 돌아가 약 4년 후 <수사고신록>을 비롯한 4종의 책을 판각하여 400부를 찍는 등 일부 판각을 내었지만 실제 판각은 최술의 저술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진리화는 스승과 서신만 교환하다가 1816년, 24년 만에 다시 북경의 스승을 찾지만 최술은 이미 다섯 달 전에 죽은 뒤였다. 그를 기다린 것은 운남에서 진리화라는 사람이 오면 주라는 편지와 함께 34종 88권의 글이 담긴 9개의 상자였다. 진리화는 이를 고향으로 실어갔다. 그리고 최술 사후 8년인 1824년 자신의 남은 재산을 다 쏟아 부어 19종 54권의 책을 판각하고 이듬해에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간신히 빛을 본 최술의 저술들은 그러나 어지러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빛을 보지 못했다. 1840년대의 아편전쟁, 1850년대의 태평천국의 난, 1895년의 청일전쟁, 1900년의 의화단 사건 등으로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말려들었다. 그의 저술에 관심을 가질 여건이 못 되었던 것이다. 그때 이 침략의 물결에 편승했던 일본이 북경의 한 서점가에서 이 고신록을 비롯한 여러 책을 발견, 일본으로 가져가 1903년 <최동벽선생유서(崔東壁先生遺書)>를 발간했다. 이 책은 1921년 중국으로 역수입되었고 당시 신문화운동을 추진하던 고힐강, 호적, 양계초, 진독수, 전현동 등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6년 드디어 고힐강에 의해 중국판 <최동벽유서>가 출간되었다. 최술이 집필을 하고 대략 150여 년이 지나서였다.

최술의 <수사고신록> 등이 출현한 과정을 내가 비교적 소상히 소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온갖 신고를 겪고 출현한 저술을 우리는 어쩌면 낯선 문명에서 찾아온 크릴만큼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논어 관련, 공자 관련 책자들은 여전히 터무니없는 일화들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논어와 공자에 숨어 있는 진실을 찾아내기에 앞서 어떤 것이 진짜 논어이고 공자인가 하는 팩트에서부터 진위가 가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테면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느니, 소정묘를 주살하였다느니, 제나라에 갔을 때 안영이 공자를 헐뜯어 등용을 저지하였다느니, 제나라가 노나라가 강대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여악(女樂)을 보내왔다느니, 만년에 시경, 서경을 산정(刪定)하였다느니, 주역의 전(傳)을 공자가 지었다느니 하는 등등 최술이 그 근거 없음을 밝혀 놓은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그런 이야기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특히 공자의 생애를 이야깃거리로 삼으려는 서푼짜리 소설가들은 그런 소재를 배제하고 나면 할 이야기가 거의 없어지기 때문인지 더욱 그런 터무니없는 일화들에 매달리는 것 같다. 심지어 공자의 출생이나 부모와 얽혀 있는 일화들은 최술에 의하면 하나도 믿을 바가 못 된다. 그런데도 그 일화들은 마치 그것 없이는 공자가 공중에 뜨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전히 신봉되고 있다. 심지어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가 무녀(巫女) 출신이라는 시라카와 시즈카라는 한 일본인의 터무니없는 추정을 한 대중강사가 무슨 흥밋거리라도 되는 양 국내에 무책임하게 퍼뜨린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논어와 공자를 둘러싼 최대의 과제는 여전히 해석이고 해석에 담긴 의미일 것이다. 고신(考信)의 문제는 어쩌면 그보다 더 기초적인 문제이고 그런 의미에서 더 우선되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그나마 <수사고신록>이 번역 소개된 것이 2009년 10월이었다. 경성대의 이재하(李在夏) 교수를 위시한 번역팀의 노작이었다. 지난날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을 쓰는 데에 참고하기 위해 어렵게 원서를 구해 끙끙거리며 보던 일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에 간단히 소개한 최술의 생애도 그 책의 앞부분에 이재하 교수가 마치 소설처럼 생생하게 서술해놓은 매우 감동적인 기록을 토대로 요약한 것이다.

물론 <수사고신록>의 한계도 있다. 당연한 일이다. 내후년이면 최술이 세상을 떠난 지도 200년이 된다. 당시는 청대였다. 지금과는 모든 문물이 비교할 수 없으니 수사(洙泗)의 일을 보는 눈인들 왜 변하지 않았겠는가? 이미 내가 <논어의 발견>을 쓰는 과정에서 눈에 띈 것만 해도 한둘이 아니다.

이를테면 공자에게 “제자들 중에 누가 배우기를 좋아하느냐?”고 한 질문은 두 개의 단편(옹야/3, 선진/7)에 걸쳐 애공(哀公)도 하고 있고 계강자(季康子)도 하고 있다. 최술은 날카롭게도 이 두 질문이 각각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중 하나의 질문이 진본이고 다른 하나는 변조작임을 밝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최술은 애공의 질문이 진본일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추정이었다. 계강자의 질문이 진본이다.

또 자복경백(子服景伯)이 자로(子路)를 참소한 공백료(公伯寮)에 대해 그를 죽이겠다고 흥분하는 것을 공자가 만류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외유 이전의 사실로 보고 있지만 그것은 공자와 자로가 외유에서 돌아와 계강자의 정치를 돕고 있던 최만년의 대화였다. 또 공자가 남자(南子)를 만난 사실, 그리고 공산불뉴(公山不狃)나 필힐(佛肸)의 부름에 가려 했던 것에 대해서도 그는 한사코 공자를 헐뜯으려는 후대인들의 위작이며 ‘결코 있을 수 없는 일(必無之事)’이라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에 대한 최술의 지나친 신뢰와 공경에서 나온 것에 불과했다. 또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었다는 것을 최술이 아무런 의심 없이 믿은 것도 그의 고증학이 넘을 수 있는 높이에 얼마만큼은 시대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낡은 시대의 어둠에 혼몽하게 묻혀 있던 논어와 공자를 현대의 밝은 빛 속에 다시 세운 역사적 작업이었다는 평가를 어찌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최술, 까마득한 200년도 더 전에 높은 과학정신으로 크릴을 감동시켰던, 청나라의 한 가난한 선비의 작업은 오늘도 기필코 계속되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은 과학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양심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업을 승계하기에 앞서 적어도 그가 이미 이루어놓은 학문적 성과만큼은 우리 경학계가 좀 더 진지하게 받아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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