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58

69 그동안 베드로는 바깥뜰에 앉아 있었는데 여종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군요” 하고 말하였다. 70 베드로는 여러 사람 앞에서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소” 하고 부인하였다. 71 그리고 베드로가 대문께로 나가자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는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자렛의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72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다시 부인하였다. 73 조금 뒤에 거기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 오며 “틀림없이 당신도 그들과 한 패요. 당신의 말씨만 들어도 알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74 그러자 베드로는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잡아떼었다. 바로 그때에 닭이 울었다. 75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떠올라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다. (마태 26,69-75)

▲ <부인하는 베드로>, 렘브란트, 1660년
예수가 등장하지 않고 베드로가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단락이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대답하는데 부인, 맹세, 저주로 그 잡아떼는 정도가 갈수록 더해진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14,66-72를 조금 다듬고 바꾸었지만 의미상 큰 변화는 없다. 베드로의 대답은 앞 단락의 예수 심문과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되었다. 예수가 피고인으로 서서 대사제 앞에서 심문받을 때 베드로는 방청객으로 앉아서 여종들과 사람들에게 심문받는다. 심문에서 스승이 당당히 답변할 때, 제자는 스승을 모른다고 강력히 부인하였다.

집, 마당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잇는 단어 아울레(aule)는 여기서는 집(마태 26,58)이 아니라 마당을 가리킨다. 베드로에게 질문하는 여종이 예수를 “갈릴래아 사람”(anthropos galilaios)이라고 말하는 것이 주목된다. 예수를 잠재적인 혁명가로 규정하는 명칭인 것 같다고 개신교 성서학자 슈바이처는 말한다. 그 호칭은 신약성서 전체에서 본문과 루카 복음서 23,6에서만 나타난다.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마태오 공동체가 갈릴래아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로마 군대에 대한 무장투쟁을 벌인 젤로데파도 예수 운동처럼 역시 갈릴래아에서 생겼다. 예수는 반골(反骨)의 고장 갈릴래아 출신이다.

70절 베드로가 여러 사람 앞에서 예수를 부인한 것은 유다교 랍비들에 따르면 개인적으로 맹세한 것보다 훨씬 나쁜 짓이다. 71절에서 베드로에게 질문한 여종은 문을 지키는 수위인 것 같다. 문지기 일은 여성에게도 맡겨졌다(2사무 4,6; 사도 12,13). 다른 여종이 예수를 나자렛 사람(마태 2,23)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수의 출신 고장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예수가 메시아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호칭이다. 마태오 복음이 쓰일 무렵 이 단어는 예수 추종자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이미 사용되었다(사도 24,5).

73절에서 베드로의 말 내용은 아예 언급되지도 않고 그 말씨로 베드로가 예수와 한패냐고 추궁 당한다. 예수 추종자들이 아람어 갈릴래아 사투리를 썼다는 것을 알려준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목구멍을 울려서 내는 후음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랍비 문헌에도 그런 지적이 나온다. 그 발음으로 갈릴래아 사람들은 수도 예루살렘 사람들과 쉽게 구분되었다. 지방과 수도 사이에 경제적 갈등까지 겹쳐 지역 갈등이 분명 있었다고 가톨릭 성서학자 그닐카는 말한다. 이런 사회적 배경은 초대교회에서 예루살렘 공동체와 갈릴래아 공동체 사이에 더 심해진 것 같다.

2차 대전 때 나치는 독일어 발음을 시켜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을 색출하였다. 반대로 레지스탕스는 독일인이 잘 못하는 프랑스어 발음을 시켜서 독일인 첩자를 골라내기도 하였다. 딸에게 전라도 남자를 절대 사귀지 말라고 명령한 어느 부모에게 딸의 전라도 연인이 결국 발음에서 들통 난 사연을 80년대 나는 주변에서 여럿 알게 되었다. “우리가 남이가” 하며 지역감정을 부추긴 사람,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연관된 초원복집 사건도 있었다. 예수도 예수 제자들도 지역감정의 피해를 겪었다.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베드로는 세 번째로 예수를 모른다고 말했다. 초대공동체에서 예수 추종자들도 예수를 세 번 부인하도록 박해자들에게 강요받은 것 같다. 닭이 우는 것은 과월절 밤이 끝났음을 가리킨다. 동시에 베드로의 배신을 예고한 예수의 말이 베드로에게 떠올랐다(마태 26,34). 베드로는 그리스도교 믿음의 보증이지만 동시에 예수를 배신한 원조다. 고해성사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베드로의 회개(통회)가 강조되었다.

초대교회는 실망, 충격, 불안이라는 3중고를 겪었다. 유다인 대부분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에 실망하였다. 예수가 처형되고 베드로가 예수를 배신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로마 식민통치 아래 초대교회의 앞날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서 초대교회에게 탈출구는 무엇일까. 유다인을 공격하고 로마 군대에 저자세를 취하는 길을 초대교회는 선택하였다. 올바른 선택이었나.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선택이었나. 아쉬움이 참 많다.

성서학자들은 베드로의 죄를 줄이기 위해 갖은 묘수를 짜내었다. 베드로의 죄를 덜기 위해 베드로에게 질문한 여종과 유다인에게 화살을 돌리기도 하였다. 이브가 아담을 유혹하듯이 여종이 베드로에게 유도심문을 했다는 것이다. 죄지은 남자 뒤에는 꼭 여자가 있다는 식으로 여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남자들의 못된 수법은 어디나 여전한가 보다.

본문의 베드로 자리에 교황, 주교, 성직자, 그리고 나 자신을 대입해 읽어보자. 첫째, 누구나 예수를 배신할 수 있다. 둘째,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여도 행동으로 예수를 배신할 수 있다. 셋째, 행동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보여주어도 본심으로 예수를 배신할 수 있다. 겉으로 한없이 경건한 성례전(전례) 의식을 거행하는 종교인 중에 사기꾼들이 얼마나 많은가. 베드로의 눈물도 있지만, 백조의 눈물도 있고, 조용기의 눈물도 있다. 눈물이라고 다 같은 눈물은 아니다. 거짓 눈물도 많고 거짓 회개도 많다. 눈물과 회개의 진실함은 오직 하느님만 아신다.

울어라, 베드로여. 실컷 울어라. 회개의 눈물이 당신을 구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 베드로는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알아보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루카 24,34; 1코린 15,5).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이 있으며, 마태오 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 : 불의에 저항한 예수>가 최근 출간됐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