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57
57 사람들은 예수를 붙잡아 대사제 카야파의 집으로 끌고 갔는데 거기에는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모여 있었다. 58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를 뒤따라 대사제의 관저에까지 가서 일의 결말을 보려고 안으로 들어가 경비원들 틈에 끼어 앉아있었다. 59 대사제들과 온 의회는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그에 대한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다. 60 많은 사람이 와서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이렇다 할 증거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두 사람이 나타나서 61 “이 사람이 하느님의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고 증언하였다. 62 이 말을 듣고 대사제가 일어나 예수께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할 말이 없는가?” 하고 물었다. 63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대사제는 다시 “내가 살아계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니 분명히 대답하여라. 그대가 과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하고 물었다. 64 예수께서는 그에게 “그것은 당신의 말입니다” 하시고는 “잘 들어두시오. 여러분은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또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65 이 말을 듣고 대사제가 자기 옷을 찢으며 “이 사람이 이렇게 하느님을 모독했으니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소? 여러분은 방금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듣지 않았소? 66 자,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하고 묻자 사람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하고 아우성쳤다. 67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또 어떤 자들은 뺨을 때리면서 68 “그리스도야,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아라” 하며 조롱하였다. (마태 26,57-68)
예수의 죽음에 유다인의 책임이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오랜 주장이 결국 오늘 본문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예수가 빌라도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유다인의 누명을 벗기려는 유다인 측의 노력도 있었다. 샴 코헨(Chaom Cohen)은 최고회의가 로마 총독의 재판에서 예수를 구출하려고 애썼다고 주장하였다. 폴 윈터(Paul Winter)는 대사제의 집에서 예수에 대한 간단한 조사가 있었지만 예수 체포에서 재판까지 주요한 역할은 로마 총독이 맡았다고 말한다.
유다 최고회의에서 예수의 재판 보도에 대해 성서학계에서 크게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첫째, 역사에 근거한 보도가 아니고 순전히 그리스도교가 창작한 이야기(Bultmann). 둘째, 완전히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기록(가톨릭 성서학자 Blinzler, R. Pesch). 셋째, 대사제에 의한 심문이 있었지만 공식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는 입장.
대부분 성서학자들은 셋째 입장을 지지하며 나도 그렇다. 그러면 몇몇 유다인 귀족들이 개인적으로 예수를 심문한 것일까, 아니면 공식적인 심문이었을까. 아마도 공식적인 심문인 것 같다. 유다 지역에서 공공질서 확립에 유다 지배층이 책임을 맡았고, 예수를 체포하고 심문하는데 그 경찰력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이 심문에서 예수의 혐의는 무엇이었나. 세 종류로 볼 수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의 발언들과 성전항쟁에 대한 심문이 있었을 것이다. 성전에서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쫓아낸 사건이 아마도 예수의 처형을 가져온 이유라고 개신교 성서학자 루즈(Luz)는 주장한다. 나도 이 의견을 지지한다. 성전에 대한 예수의 말과 행동이 직접적으로 예수의 체포와 처형에 이르게 하였는지에 대해 별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크로산(Crossan)의 입장을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성전은 종교적 의미뿐 아니라 유다인들과 로마 군대 사이에 경제적 이유로 자주 갈등을 빚은 장소다. 성전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큰 고용주였다. 예수의 성전항쟁은 옛 시대에 예언자들과 사제들이 충돌한 역사(예레 26)를 다시 보여주는 것 같다.
심문에서 예수의 신분, 즉 예수가 메시아냐 하느님의 아들이냐가 질문되었을 것이다. 대사제는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냐고 물었으며 예수는 분명히 긍정하였고, 대사제는 그 이유로 예수를 로마 군대에 넘겼을 것이다. 예수를 우상숭배를 부추겨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가짜 예언자자로 보는 주장이 오늘날 등장하고 있다. 예수의 말과 활동에 비추어 납득하기 어려운 의견이다. 이처럼 최고회의 심문 과정의 역사성은 예나 지금이나 계속 논란되고 있다. 예수에 대한 혐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최고회의에서 예수에 대한 심문 관련 복음서 보도는 모두 세 가지로 서로 다르게 전승되었다. 예수 저항사에서 가장 서투르게 전해진 전승으로 여겨진다. 마르코 복음 이전의 전승이 가장 중요하다. 그 자세한 내용을 여기서 다 소개할 수는 없어 안타깝다.
세 전승은 한 가지에서는 일치한다. 예수가 빌라도에게 넘겨지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는 장면과 가깝게 심문 보도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세 문제에 대해서 복음서는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 첫째, ‘공식적인’ 최고회의가 열렸느냐. 둘째, 예수가 최고회의에서 ‘공식적인’ 판결을 받았느냐. 셋째, 이 회의가 밤에 열렸느냐.
더 복잡한 문제는 최고회의에서 예수 측의 목격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약점을 의식해서 “대사제의 관저에까지 가서 일의 결말을 보려고 안으로 들어가”(마태 26,58), “멀찍이 떨어져서 뒤따르다가”(루카 22,54) 구절이 슬쩍 끼워졌다. 요한 복음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대사제와 잘 아는 사이여서 대사제의 집 안뜰까지 들어갔다고 말한다(요한 18,15). 초대공동체가 최고회의 심문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이 선교하다가 유다인에게 당했던 경험이 그 관심을 더 자극하였다.
예수 심문에 대한 복음서의 보도와 하느님 모독에 대한 유다교의 까다로운 규정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것은 이제 잘 알려졌다. 복음서 보도라면 예수는 유다교에서 사형죄로 여겨지던 하느님 모독죄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복음서 보도는 최고회의가 대사제의 집에서 열렸다고 하지만 유다교 규정에 따르면 최고회의는 대사제의 집에서 열리지 않는다.
십자가 처형은 오직 로마 군대만 가진 권한이어서 유다교는 예수에게 그런 판결을 내릴 수도 없었다. 만일 최고회의에서 예수에게 사형 판결을 했다면 예수는 유다인들에게 십자가 처형이 아니라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보도는 복음서에 없다. 로마 군대의 재판에 유다인 지배층이 일부 협조한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전부인 것 같다.
예수의 죽음에 유다인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유다인들은 이런 결론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모든 유다인이 그런 도움을 로마 군대에 준 것은 아니다. 당시 모든 유다인들이 그 책임을 질 이유도 없다. 유다인 후손들이 그 책임을 뒤집어쓸 이유는 물론 없다.
유다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느니, 유다인들이 예수의 죽음에 주요한 책임이 있느니 하는 말은 학문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그런 발언은 그리스도교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그것은 무식한 발언일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옳지 못한 발언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이 있으며, 마태오 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 : 불의에 저항한 예수>가 최근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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