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8

 

사람들은 종종 이런 논쟁을 벌인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 아니..." 나는 가능하면 이런 식의 논쟁에 끼어들지 않는다. 끼어든다고 해도 어느 한 편을 두둔하지 않는다. 신이 있다는 말이나 없다는 말이나 따지고 보면 똑같은 차원에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있다’는 말이 ‘없다’는 말에 대해 상대적인 용어라면, 신은 그러한 상대성 안에 함몰되는 분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상대’(相對)는 ‘서로(相) 마주한다(對)’는 뜻이다. 서로 마주함으로써만 자기 정체성이 확인되는 존재에게 쓰이는 용어이다. 가령 부모는 자식을 마주함으로써만 부모이고, 자식은 부모를 마주함으로써만 자식이다. 부모 없는 자식, 자식 없는 부모가 어디 있던가. 마찬가지로 학생은 선생을 마주함으로써만 학생이고 선생 역시 학생을 마주함으로써만 선생이다. 남자는 여자를 마주할 때 남자이고 여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은 서로 마주함으로써만 존재하는, 상대적 존재들이다. ‘있다’ 역시 ‘없다’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고, ‘없다’ 역시 ‘있다’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다. 따라서 신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모두 신을 상대성 차원에 둔 논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신을 어찌 상대적 존재 차원으로 함몰시켜버릴 수 있겠는가. 신은 이러한 차원을 넘어선다. 상대성에 매몰되지 않기에 신인 것이다. 다음이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이라 할만하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야?’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출애굽기 3:7-15)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거의 신적으로 받들어지는 존재인 모세가 신을 만나는 장면을 배경으로 한다. 이집트 왕자로 살던 모세가 이집트 군인을 죽이고는 미디안 땅으로 도망쳐 나왔다. 그곳에서 제사장 이드로의 딸 시뽀라와 결혼하여 양치기로 잘 살고 있었을 때였다. 하루는 양떼를 몰고 광야에 지나 호렙산으로 갔다가 불에 붙기는 했는데 타지는 않는 떨기나무를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신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 신은 이집트 땅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동족들을 구해내라고 모세에게 명령했다. 모세는 걱정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누가 너를 보냈느냐’고 사람들이 물을텐데, 그러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겠습니까? 그 때 그 신이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이렇게 밝히는 것으로 나온다: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우리말로 하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개역, 표준새번역) 또는 “나는 나다”(공동번역)가 된다.

어떻게 번역하든 맞는 번역이다. 아니 어떤 것도 어쩌면 본래의 히브리어를 충실히 드러내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 구절의 영어 번역인 I am that I am이 그래도 우리가 좀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이다. I를 한정해주는 that 이하 구절이 I am으로 끝난다. 어찌 번역해야 하는가. 달리 재간이 없다: “나는 나다” 라든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번역할 밖에는.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앞에서 본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무엇 무엇 때문에 존재한다. 아이는 부모 때문에 존재하고, 부모 역시 아이가 있음으로써만 의미있는 개념이다. 책상은 목수가 만들었기에 존재하고, 말은 귀가 있기에 말로서 들린다. 신자 없는 교회가 있을 수 없고, 시작이 없는 끝이 있을 수 없다. 학생은 선생으로 인해 존재하고 선생 역시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모세에게 자신을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밝히는 신 규정에는 스스로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만유의 조물주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창조주를 설명하는 데 피조물적인 개념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가령, ‘나는 선한 자이다’, ‘나는 너희를 창조한 자이다’, ‘나는 우주의 주재자이다’ 어떤 표현을 쓰든 모든 것은 다 피조적 개념이다. 선, 창조, 주재자 등등 어떻게 하든지 모두 피조적이고 인간적인 개념이다. 신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피조물에게 제한되는 피조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이 자신을 설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방법은 신 자신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라고 밖에 표현될 도리가 달리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은 자존자(自存者), 절대자(絶對者)이다.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신뿐이다. 다른 것은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에 의해 생겨났다. 그래서 신은 조물주이시고, 만유는 피조물인 것이다. 만물은 스스로 생겨나지 않았고, 신만 스스로 있는 자이다. 그래서 I am that I am을 개역성서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도 번역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신 앞에서 언제나 겸손할 수밖에 없는 의존적 존재인 것이다. 이 마당에 신이 어찌 특정 언어적 규정, 종교적 개념 안에 다 갇히는 상대적 존재이겠는가.(다음에 이어서)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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